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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016
한자 儒敎
영어공식명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창환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공자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그 계승자들에 의해 실천된 학문적 활동과 의례적 행위 일반.

[개설]

영주시는 ‘선비의 고을’로 불림에 대단한 자부심을 품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1243~1306]이 바로 영주시 출신이며, 안향을 모시기 위한 우리나라 최초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영주시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영주의 유교 관련 역사는 우리나라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이르다고 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1243년(고종 30) 지금 영주시 순흥면에서 태어난 안향은 18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지만 23세까지 고향에 근거를 두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에 이미 영주에는 유교적 교양의 기반이 잘 갖추어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영주의 유교적 기반은 이후로 더욱 굳건히 다져졌다.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 쓴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의 행장을 보면, 정도전의 아버지가 1320년(충숙왕 7) 10여 세에 영주향교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것은 1368년(공민왕 17) 당시 지군사 하륜(河崙)[1347~1416]이 영주향교를 세웠다는 『영주지(榮州誌)』의 기록을 뒤집는다. 두 가지 기록을 비교해 보면, 영주향교의 건립이 50년 이상 차이가 난다. 이것은 몽골 침략기에 파괴되어 버려졌던 향교를 고려 후기에 오면서 다시 건립하였는데, 하륜이 건립했다는 것도 바로 이때 재건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면 영주향교는 인종이 1127년(인종 5) 3월에 “여러 주(州)에 학교를 세워 널리 교도하라.”라는 조서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매우 이른 시기 향교를 통해 유교가 보급된 영주에서 신유학이라 불리는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이 길러지고,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이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영주의 습속이 유순하고, 사족 집안이 많다는 기록 또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영주 정체성의 정수이자 자긍심인 유학의 전통은 현재까지 계승·보존되어 선비의 고장 영주를 빛내고 있다.

[변천]

영주는 일찍이 향교가 설립되어 유교가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에 성리학의 나라라고 일컫는 조선에서는 더욱 번창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다. 그것은 정도전이 이방원 일파에 의해 살해되고, 뒤이어 세조 때 단종복위운동과 정축지변(丁丑之變)으로 인해 반역의 고을로 낙인찍혀 유교의 발전이 순조롭게 이어지지 못했다.

영주에서 다시 유교가 활기를 되찾은 시기는 주세붕(周世鵬)[1495~1554]과 이황(李滉)[1501~1570]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먼저 주세붕은 부임한 지 2년이 지난 1543년(중종 38)에 안향이 어릴 적 글을 읽던 곳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여 안향의 위패를 봉안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이어 1549년(명종 4)에 부임한 이황은 경상도관찰사를 통해 백운동서원에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려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명종이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라는 뜻을 담은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이황은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었다. 물론 당시 풍기에는 이황과 깊은 교류를 가진 황효공(黃孝恭)과 같은 학자도 있었지만, 이황소수서원에서 강학하면서 많은 선비가 배출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다. 이황이 편지에서 “영주에는 소고가 있고, 풍기에는 금계가 있다[영유소고 풍유금계(榮有嘯皐 豊有錦溪)]”라고 할 만큼 뛰어난 학자였다. 황준량은 생전에 4개 학교를 세웠는데, 이황이 “금계가 세운 학교에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라고 할 만큼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박승임은 관직에 있으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향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여 그의 문집 『문인록』에는 남몽운을 비롯해 50여 명의 이름이 올랐다.

[현황]

영주에는 한 가지 비극적인 사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축지변이다. 1457년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을 중심으로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 중인 단종을 복위시키는 거사가 일어났다. 하지만 내부의 고발자로 인해 거사는 사전에 발각되어 금성대군은 사약을 받고, 이보흠은 참형 당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처벌은 금성대군·이보흠에게만 내려진 것이 아니라, 순흥 인근 30리[12㎞] 지역 백성들에게도 역모의 혐의를 씌워 수많은 주민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조카[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임금[세조]에 대한 저항이 당시에는 역모로 몰렸지만, 역사는 의로운 항거로 평가하고 있다. 영주는 이러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영주 금성대군 신단을 설치하고 관련 인물들의 제사를 받들어 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정신은 영주의 선비정신으로 승화되어 두암(斗菴) 김약련(金若鍊)과 같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김약련은 「관수설(灌水說)」이란 글에서 가뭄으로 물이 부족할 때 내가 먼저 물을 끌어들여 이로움을 취하는 것이 곧 남에게 해로움이 되는 것을 깨닫도록 양보의 미덕을 설파하였다.

이런 의로운 정신은 현대에도 이어져 오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균관유도회 영주지부를 비롯해 성균관유도회 풍기지부, 성균관유도회 순흥지부, 성균관여성유도회 영주지부, 박약회 영주지회, 담수회 영주지회라는 유교 단체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1980년대를 전후로 형성되었다. 이들은 우리나라가 경제성장과 함께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감을 안타까워하여 선비의 고장인 영주의 정신을 일깨우고, 인성교육과 예절교육으로 올바른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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