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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지방지도』 「영천군·순흥부·풍기군팔면지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275
한자 一八七二年地方地圖榮川郡順興府豊基郡八面地圖
영어공식명칭 『In 1872, Region Map』 「Yeongcheon-gun·Sunheung-bu·Punggi-gun Palmyeon Map」
분야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감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작성 시기/일시 1872년연표보기 - 『1872년 지방지도』 「영천군·순흥부·풍기군팔면지도」 제작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성격 지도

[정의]

개항기에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에 수록된 영천군·순흥도호부·풍기군 지도.

[개설]

『1872년 지방지도』는 조선 정부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고, 서양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제작되었다. 필사본 회화식 채색지도책이자, 국가 주도로 제작된 전국 단위의 군현지도에 해당하는데, 영주 지역의 지도로는 「영천군지도」·「순흥부지도」·「풍기군팔면지도」가 있다.

[제작 발급 경위]

고종의 즉위로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확립에 주력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각 지방 군현의 행정과 민생 현황을 파악해 나갔다. 한편으로는 잇달아 발생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국방 강화의 필요성도 요구되고 있었다. 이에 1871년(고종 9) 각 군현의 정보가 담겨 있는 전국적 단위의 읍지를 편찬하였고, 1872년에는 지방지도를 제작하였다.

[형태]

『1872년 지방지도』는 회화식 채색지도로 총 459매이다. 크기는 가로 70~90㎝, 세로 1.0~1.2m 등으로 일정하지 않다.

[구성/내용]

조선시대 영주는 영천군·순흥도호부·풍기군으로 구성되었기에, 『1872년 지방지도』에서는 이들 고을을 각각의 지도로 그렸다.

「영천군지도」는 북쪽에 소백산, 남쪽에 학가산, 서쪽에 구계(龜溪), 동쪽에 사천(沙川)이 감싸 도는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는 적색 테두리를 쳐서 나타내었고, 도로는 적색 선으로, 하천은 청색 선으로 그려져 있다. 산지는 연맥(連脈)의 형태로 그리지 않고 독립적인 봉우리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또 읍시(邑市)를 비롯하여 ‘반구시(盤邱市)’, ‘오천시(迃川市)’가 표시되어 있어서, 조선 후기 활발히 개시되었던 장시의 위치와 영천군의 유통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순흥부지도」는 산맥을 연접시켜 맥세(脈勢)를 강조한 형태로 표현하였다. 하천은 검은 점선을 그려 넣어 다른 군현 지도와 차이가 난다. 읍치는 읍기(邑基)라고만 표시하였고, 각 면과 면 소속의 촌락은 둥근 원 안에 기록하였다. 이 밖에도 도로는 적색의 실선으로 그려져 있고, 부석사를 비롯한 서원과 봉수 등을 묘사하였다.

「풍기군팔면지도」에는 각 방면의 방위에 따라 산지가 배치되어 있다. 산맥은 연맥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산도(山圖)적인 기법이 사용되었다. 북서쪽에는 죽령산과 창락도(昌樂道)가 위치해 있는데, 순흥의 월경지로 되어 있다. 서쪽의 명봉산에는 ‘경모궁태실(景慕宮胎室)’과 ‘문종대왕태실(文宗大王胎室)’이 표시되어 있다. 읍치는 주변 지역과 이질감이 없도록 회화적인 관아 건물은 그리지 않았고, 각 면과 소속 촌락에는 읍치로부터 거리를 주기하였다. 읍치 남쪽 하천변에는 인공림인 식송(植松)도 보인다.

[의의와 평가]

『1872년 지방지도』 「영천군·순흥부·풍기군팔면지도」는 전국적인 단위의 지도이기 때문에 군현마다 지도의 모습이 다르고 담긴 정보량도 차이가 난다. 지도는 회화적인 미적 감각이 뛰어나면서도 내용이 상세하다. 산과 하천, 고개, 사찰, 역참, 장시, 면리 등 당시 지역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19세기 후반 영주 지역의 행정·경제·사회·군사적 정보와 그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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