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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48
한자 獨立運動
영어공식명칭 Independence Movement
이칭/별칭 민족운동,민족해방운동,민족독립운동,해방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영주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족해방운동.

[개설]

영주 지역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은 1895년(고종 32) 을미의병에서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895년 을미의병기 영천(榮川)·풍기·순흥에서는 의병진이 결성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05년 이후 을사의병과 1907년 이후 정미의병에서 대일항전이 전개되었다. 1910년대 전반기에는 대한광복단과 대한광복회 등 국내외에 걸쳐 전개된 독립운동, 1910년대 후반기에는 조선13도총간부의 독립운동자금모집운동, 최익한(崔益翰)의 독립군자금모집사건,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의 군자금모집사건 등이 주목된다. 1919년의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영주 지역에서는 각처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고,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국내외 독립운동을 비롯한 청년운동·농민운동·사회운동이 이어졌다.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개항기 국권회복운동]

대한제국기 국권회복운동은 의병운동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의병운동은 시기적으로 을미의병기[전기의병], 을사의병기[중기의병], 정미의병기[후기의병]로 구분할 수 있다. 을미의병기 영주의 의병부대로는 1896년 2월 6일 창의하였던 김우창(金禹昌)의 영천의진(榮川義陣), 1896년 3월 창의하였던 홍종선(洪鍾善)의 순흥의진(順興義陣), 1896년 3월 14일 창의하였던 김교명(金敎明)의 풍기의진(豊基義陣) 등이 있다. 그 외 영주 출신 신태운(申泰雲)·김휘정(金輝珽)·홍사구(洪思九)·장복규(張復圭)·이종보(李鍾輔)·이현구(李賢求)·신봉균(申鳳均) 등이 영주 지역에서 창의하거나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의병기에는 1905년 9월 단양의병(丹陽義兵)과 호좌의병(湖左義兵)이 영주 지역에 들어와 활동하였는데, 충청도 단양 지역에서 활동하던 원용팔·정운경 등이 거느린 의병부대가 순흥과 영천에 진출하여 활동하였다.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이후 1907년 8월 1일부터 1910년까지 정미의병기에는 다른 지역에서 창의한 의병장들과 영주 지역 출신 의병장들이 영주 일대에서 불굴의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중 이강년 부대는 1908년 5월 전후에 걸쳐 치열한 대일항전을 벌였다. 1908년 7월 청풍의 작성전투에서 체포된 이강년이 1908년 10월 순국하자, 이 휘하 장령들이 각자 김상태 부대(金相泰部隊)·최성천 부대(崔聖天部隊)·김운선 부대(金雲仙部隊)·금달연 부대(琴達淵部隊) 등을 조직하여 경북 북부 지역의 소백산과 태백산을 근거지로 1910년 나라가 망할 때까지 대일항전을 전개해 나갔다.

영주 지역의 계몽운동신교육구국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영주 출신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회원들의 활동이 주목된다. 교남교육회는 1908년 3월 서울에서 활동하던 영남 출신 인사들이 상호 간 친목과 계몽사상의 보급을 목표로 설립한 조직이다. 여기에 참여한 영주 출신 인사들은 이후 영주 지역으로 돌아와 신교육구국운동을 위한 학교 설립에 주력하여 1906년부터 1910년 사이에 사립소흥학교, 사립안정학교, 사립강명학교, 사립조양학교, 사립내명학교 등을 설립하고 국권 회복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1910년대 무단통치 하의 독립운동]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1910년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국내 독립운동 단체로는 1913년 풍기에서 결성된 대한독립단이 주목된다. 대한독립단은 만주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였는데, 1915년 음력 7월 15일 조선국권회복단과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군자금의 모집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영주 지역에서는 대동상점(大同商店)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코자 하였다.

1919년 10월 영주 풍기 출신 강택진(姜宅鎭)은 박시묵(朴時黙)·박상목(朴尙穆) 등과 함께 조선13도총간부를 결성하고 영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부하였다. 그 외 최익한(崔益翰)의 독립군자금모집사건,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의 군자금모집사건은 각각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의 서로군정서에 보낼 군자금모집사건이다.

[1919년 3.1운동과 독립청원운동]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영주 지역에서는 영주면 만세시위운동,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장수면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먼저 1919년 3월 21일 박인서(朴仁緖)·오하근(吳夏根) 등이 영주장날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 1919년 4월 9일에는 안용호(安容鎬)·남영진(南永鎭)·최성원(崔盛源) 등이 풍기장날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1919년 4월 11일에는 영주군 장수면 호문리에서 손달익(孫達翼)·장윤덕(張潤德)·송득용(宋得龍) 등이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

3.1운동 이후에는 파리만국평화회담[파리평화회의 또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독립청원운동이 벌어졌다. 김창숙(金昌淑) 등이 주축이 되어 「독립청원서」를 짓고 여러 지역 유림의 동참을 촉구하였는데, 당시 영주 지역에서는 김동진(金東鎭)·김택진(金澤鎭)·정태진(丁泰鎭) 등 3인이 참여하였다.

[1920년대 소위 ‘문화통치’ 하에서 독립운동]

1920년대 영주 출신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외에 걸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민족운동으로서 청년운동·농민운동, 신간회근우회를 통한 항일민족협동전선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 독립운동으로 주목되는 것은 1925년 김창숙이 내몽골 지역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계획하고, 자금 20만 원을 모집하기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 발각된 제2차 유림단사건[제2차 유림단의거]이 주목된다. 당시 영주 출신 인사로는 송영호(宋永祜)송재호(宋在祜) 형제가 적극적으로 활동하였고, 김동진(金東鎭)·박제형(朴在衡) 등이 참여했다.

1920년대 초반 영주 지역의 청년운동은 1920년 6월 결성된 영주청년회, 1920년 8월 결성된 풍기기독청년회, 1924년 2월 결성된 풍기청년회 등의 활동이 주목된다. 1920년대 중반 청년운동은 민족주의적 성격과 사회주의적 성격의 청년운동으로 분화·발전하면서, 1926년 1월 철우단이 창립되었다. 1926년 11월에는 영주청년동맹이 창립되어 청년운동은 통일적인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27년 11월 결성된 신간회 영주지회, 1929년 4월 결성된 근우회 영주지회와 연계한 항일민족협동전선운동의 형성도 주목된다.

1920년대 영주 지역 농민운동은 1920년 초 결성된 조선노동공제회 영주지회, 1923년 3월 결성된 풍기소작조합, 1929년 3월 결성된 영주농민조합 등이 주도하였다. 1930년대 농민운동으로는 1932년 4월 결성된 영주군공산주의자협의회, 1932년 10월 결성된 적농재건투쟁위원회, 1935년 5월 결성된 영주적색노동조합건설위원회 등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30~1940년대 독립운동]

1930년대 이후 전시 파시즘 체제하에서 영주 지역의 국내 독립운동은 위축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공출 거부, 유언비어 유포 등 소극적인 저항을 통해 불만을 표출하였다. 1939년 영주 출신 이임태(李林泰)가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는데, 이러한 저항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국외 독립운동으로는 영주 출신 박진양(朴震陽)·박태양(朴泰陽) 형제의 활약이 주목된다. 이들은 1934년 봄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국인 훈련반에서 교육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 영주 출신 이응락(李應洛)장석창(張錫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광복군[한국광복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 외 1940년 6월 일본으로 건너가 민족의식의 고취,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통치 비판, 기독교도의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반대 등의 운동을 전개한 목사 김은석(金恩錫)의 활동도 주목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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