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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70
한자 現代
영어공식명칭 Present Ag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1945년 8·15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경상북도 영주시의 역사.

[개설]

영주시는 소백산·도솔산·어래산 등 산들이 어우러진 소백산맥에 안긴 지역으로 전통시대 영천·풍기·순흥의 세 고을이 모여 1914년 새롭게 형성된 곳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1945년 영주군으로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6.25전쟁 때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1961년 일어난 영주 대홍수는 영주 시가지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이후 영주 지역은 경제발전 속에 경북 북부 철도 교통의 중심지로 빠르게 성장하였으며, 1980년 4월 1일에는 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되면서 풍기읍과 9개면은 영풍군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이촌 현상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하고 있으며, 현재는 저출산 고령화라는 최대 당면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현대 영주는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유지·발전시켜 왔으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 분야에 걸쳐 다양한 지역사를 창출하였다.

[행정구역의 변천]

1945년 8월 15일 영주 지역은 1개 읍 10개 면 체제의 영주군으로 있으면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직후 미군정청과 1948년 8월 15일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영주군 체제를 한동안 유지하였다. 이후 지속적인 인구 증가로 1973년 7월 1일 풍기면이 풍기읍으로 승격되었으며, 봉화군 상운면의 내림리와 두월리가 영주군 이산면으로 편입되었다. 영주읍이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980년 4월 1일 「동해시시설치와시·군관할구역및명칭변경에관한법률」[법률 제3188호, 1979. 12. 28. 제정]에 근거해 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되었다. 이때 풍기읍과 나머지 면은 영풍군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영주시와 영풍군의 분리는 민원 상 많은 불편을 발생하였다. 이는 종래 같은 동네, 같은 학교·시장 등을 다니던 지역이 각각 다른 시와 군으로 나누어짐으로써 나타난 현상이었다. 또한, 시와 군 간 개발격차는 심화되어 갔다. 이에 통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95년 1월 1일 「도농복합형태의시설설치등에관한법률」[법률 제4774호, 1994. 8. 3. 공포]에 의해 영주시와 영풍군을 통합하여 지금 영주시가 탄생하였다.

[정치]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새로운 국가건설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에 1945년 10월 25일 경북인민위원회 결성에 따라, 영주에도 영주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 대회에 영주군 대표로 황순일이 파견되었다. 이와 별개로 1945년 10월 29일 경상북도를 담당하는 군정대가 대구에 도착한 이래 영주에도 제6군정 중대가 배치되었다. 1946년 대구에서 일어난 10월 항쟁은 영주에도 영향을 끼쳐, 1946년 10월 4일 영주의 좌익 청년들이 경찰서와 우익세력의 집을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0월 항쟁은 1946년 10월 19일 무렵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 진정되었다. 그에 따라 영주경찰서 유치장에는 137명의 시위자가 수감되었다. ‘10.1사건 대책위원회’의 조사보고에 따르면, 이 당시 7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건물 4채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한국문제가 UN으로 이관된 뒤 치러진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 영주에서는 대동청년당 소속의 최석홍이 당선되었다. 그 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에 따라 한반도는 분단을 맞게 되었고, 분단은 1950년 6·25전쟁의 불씨로 작용하였다. 6·25전쟁 때 영주에서는 1950년 7월 풍기영주지구 전투가 벌어졌으며, 1951년 1월 1.4후퇴 이후 남대리지구 전투가 벌어져 전장으로 전화하였다. 이후 6·25전쟁이 휴전회담 조인으로 인해 종료됨에 따라 전쟁복구사업이 추진되는 가운데, 이승만 정권은 반공 이념을 내세우며 체제 강화에 나섰다. 그 대표적 사례로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박용만에 대한 선거 방해와 부정 개표를 들 수 있다. 제4대 총선 당시 영주 지역은 야당 의원 박용만에 대한 경찰의 선거 방해와 협박으로 얼룩졌다. 또 개표 과정에서 ‘환표’, ‘올빼미표’ 등의 부정 개표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후 박용만은 1958년 8월 14일 대법원에 당선확인 및 당선 무효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솜방망이 처벌로 매듭지어졌다.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집권을 위하여 부정선거를 자행하였고, 이것은 4.19혁명의 단초가 되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무너지고, 제2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통일 운동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이 발생하여 민주·통일운동은 좌절되었다. 제3공화국 수립 이후 영주에서는 민주공화당 조직이 마련되고,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창근이 새로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급변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의 정치는 안정되었으며, 영주 지역에서도 민주주의와 지방자치는 정착되어 갔다. 이에 1948년 실시된 5.10 총선거 이래 현재까지 6회의 국민투표, 13회의 대통령 선거, 3회의 부통령 선거, 21회의 국회의원 선거, 6회의 전국 지방 동시 선거를 포함한 10회의 지방자치 선거, 2회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와 1회의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가 영주 지역에서 치러졌다.

[사회와 경제]

해방 이후 영주 지역은 경북 북부 지역 철도 교통의 중심지로서 성장해 나갔다. 이미 일제강점기 때 중앙선이 영주 지역에 개통되었으며, 그 기반 속에 1955년에는 영주와 삼척군 상장면 철암리[지금의 강원도 태백시] 사이의 영암선이 새롭게 개통되었다. 이어 1963년에는 도계읍 심포리[지금의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와 삼척군 황지읍[지금의 강원도 태백시] 사이에 영동선이 개통되어 영주가 강릉과 이어졌다. 또 1966년에는 경상북도 김천에서 경상북도 영주로 이어지는 경북선이 개통하였다. 이처럼 철도 교통의 중심지가 되면서, 영주 지역은 현재 규모의 도시로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한편, 1961년 7월에 발생한 영주 대홍수는 영주 시가지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 서천의 제방이 붕괴하면서 하천물이 범람하여 읍내 80%에 해당하는 공간이 물에 잠기는 등 막심한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홍수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서천의 물줄기를 변경하는 대규모 공사를 추진하였다. 공사는 1962년 3월 30일 통수식이 거행되면서 일단락되었고 영주 시내의 모습도 크게 변모하였다. 영주중앙시장에 있던 영주역영주시 휴천동으로 이전하게 되었으며, 시가지 분리로 ‘신영주’와 ‘구영주’라는 공간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 기존 서천이 흐르던 곳에는 영주시민회관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 1970년대까지 영주 지역은 크게 팽창하였고, 1980년에는 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촌 현상으로 1975년 17만 3977명에 이르렀던 인구는 지속해서 감소하였다. 1990년에는 14만 889명, 2018년에는 10만 6801명까지 감소하게 되면서,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마찬가지로 사회·경제적 성장 동력이 위축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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