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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72
한자 六二五戰爭
영어공식명칭 The Korean War
이칭/별칭 한국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연표보기 - 6.25전쟁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50년 9월 15일연표보기 - 6.25전쟁 인천상륙작전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51년 1월 4일연표보기 - 6.25전쟁 1.4 후퇴
종결 시기/일시 1953년 7월 27일연표보기 - 6.25전쟁 휴전협정 체결
종결 장소 6.25전쟁 종결 장소 -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김일성|이승만|마오쩌둥|스탈린|트루먼|맥아더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영주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된 남한과 북한 간 전쟁.

[개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종결되었다. 6.25전쟁 기간 영주 지역에서 치러진 주요 전투로는 풍기영주지구 전투남대리지구 전투가 있다.

[역사적 배경]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38선을 경계로 분단된 채 해방을 맞이하였다. 세계적 냉전이 심화되는 가운데 한반도는 이념적 대립의 장으로 전환되었다. 통일 정부 수립은 요원해지고, 결국 1948년 체제를 달리하는 두 개 정부가 한반도에 수립되었다.

남북한 정부 수립 이후 미국과 소련 양군의 철수가 시작되었지만, 남북한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정치·경제·군사 지원은 계속되었다. 1950년 1월 12월 미국 국무장관의 애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면서, 한반도 정세에 새로운 상황이 조성되었다. 1950년 4월 소련은 북한의 전쟁 계획을 승인하였으며, 이어 북한이 중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하자 군수물자와 공군을 지원해 주었다. 한편, 남한에서는 1949년 국회프락치 사건, 김구 암살, 「국가보안법」 제정, 학도호국단 결성, 국민보도연맹 조직 등을 통해 반공 정책을 강화하면서, 이승만 정부 체제는 더욱 강화되어 갔다.

6.25전쟁 발발 당시 남북한의 병력을 보면, 육군의 경우 국군 9만 6천여 명, 인민군 19만 6천여 명이었으며, 해군의 경우 국군 7천여 명, 인민군 4천7백여 명이었다. 공군의 경우 국군 1천9백여 명, 인민군 2천여 명 규모였다. 전체 병력은 국군 10만 5천여 명, 인민군 20만 3천여 명 정도로 국군은 인민군 절반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전반적으로 군사력 수준이 열세에 있었다.

[경과]

6.25전쟁은 모두 네 국면으로 전개된다. 1국면은 1950년 6월 25일부터 인천상륙작전이 시행되기 전인 1950년 9월 14일까지이다. 1국면에서는 북한의 총공세가 시작되어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된다. 2국면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으로 시작된다. 이때 유엔군과 국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38선 이북으로 북진해서,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하였다. 3국면은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시작된다. 대규모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4후퇴가 이루어지고, 다시 서울을 빼앗기지만, 재차 반격을 통해 서울을 탈환하였다. 또 3국면부터 전쟁이 교착국면에 빠지면서 휴전 교섭이 시작된다. 4국면은 1951년 7월부터 휴전협정 체결까지이다. 4국면에서는 정전을 위한 군사분계선 설정, 휴전 감시체계, 포로교환 등을 의제로 본회담이 진행되었다.

6.25전쟁 기간 영주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진 시기는 전쟁 1국면과 3국면 시기이다. 전쟁 1국면 시기에는 풍기영주지구 전투가 있었다. 풍기영주지구 전투는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4일부터 23일까지 전개되었다. 풍기영주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8사단은 개전 초기 빠른 속도로 남하하던 인민군 제8사단과 인민군 제12사단에 맞서, 병력 및 장비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열흘간 버티다 안동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비록 풍기영주지구 전투에서 국군이 패퇴하여 지금 영주 지역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었지만, 지연 효과를 끌어내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될 수 있었다.

영주 지역을 점령한 인민군은 다른 지역처럼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토지개혁을 폈으며, 인민군을 모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쟁이 2국면으로 접어들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크게 바뀌게 된다. 이 무렵 경북 북부 지역은 9월 27~28일 국군 제8사단에 의해 수복되었다. 하지만 퇴로가 차단된 인민군은 소백산맥과 태백산맥 일대에서 공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11월 20일 제9사단 제30연대가 영주·상주·문경 지구에 배치되어 공비 토벌 작전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때 소백산맥 일대에서 활동하던 공비는 1,7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전쟁 3국면 시기 영주 지역에서는 남대리지구 전투가 치러졌다. 국군 제3군단은 1951년 1월 14일부터 19일까지 영주군 부석면 남대리[현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 일대에서 남하하던 인민군과 맞서 전투를 했다. 1951년 1월 16일 남대리지구 전투의 결정적 승리를 바탕으로 국군은 인민군을 영주에서 서북 방면으로 퇴각시켰다.

[결과]

6.25전쟁은 1951년 7월 27일 남북 쌍방 간 일방적인 군사 승리 없이 휴전회담으로 일단락되었다. 군사분계선 아래에 있는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은 국군의 작전지역으로 전환되었고, 잔여 인민군과 빨치산에 대한 진압 작전이 전개되었다.

[의의와 평가]

3년 이상 진행된 6.25전쟁으로 사망자 약 150만 명, 부상자 360만 명이라는 미증유의 인명 피해를 낳게 된다. 하지만 38선이 휴전선으로 대체되었을 뿐 남북 간 분단은 굳어졌고, 세계적 냉전은 깊어져 갔다. 6.25전쟁 중 영주 지역에서도 국군과 인민군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크고 작은 피해와 상흔을 남긴 채 전쟁이 마무리되었으며, 현재 평화와 통일이 역사적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이** 2020.07.24. 답변한 내용은 확인 하였습니다. 그런데 2020.06.26.과 2020.07.17. 요청한 내용은 왜 반영이 안 되나요? 이메일로 관련 자료를 보냈습니다. 확인 후 수정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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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8
이** 6/24, 7/17 수정 요청을 하였습니다. 답변이나 수정 사항이 없는 이유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확인 후 반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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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24
이** 결과
6.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 남북 쌍방 간 일방적인 군사 승리 없이 휴전회담으로 일단락되었다. 군사분계선 아래에 있는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은 국군의 작전지역으로 전환되었고, 잔여 인민군과 빨치산에 대한 진압 작전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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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7
m****** 종결되었다. →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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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술 내용에 오류가 없으므로 제기하신 의견은 수용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20.07.16
이** 전투 날짜와 각 군 사단을 표기
풍기 전투(1950.07.14.~1950.07.24.)에는 국군 제8사단, 북한군 제8, 12사단이 참여하였고, 남대리 전투(1951.01.15.~1951.01.19.)에는 국군 제3, 7사단, 북한군 제31사단이 참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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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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