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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501
한자 榮州錦陽精舍
영어공식명칭 Geumyangjeongsa House, Yeongju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로 245-13[금계리 38]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백지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701년 - 영주금양정사 중건
문화재 지정 일시 2006년 9월 14일연표보기 - 영주금양정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88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영주금양정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현 소재지 영주금양정사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로 245-13[금계리 38]지도보기
성격 정사
양식 홑처마 팔작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황봉섭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 있는 조선 전기 정사.

[개설]

영주금양정사(榮州錦陽精舍)는 조선 전기 영주 출신의 문신 황준량(黃俊良)이 만년에 장수처(藏修處)로 삼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황준량의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황준량의 아버지는 황치(黃觶)이며, 어머니는 황한필(黃漢弼)의 딸 창원황씨(昌原黃氏)이다. 이황(李滉)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신녕현감·단양군수·성주목사 등을 역임하며 향촌 교화에 힘썼다.

[위치]

금계중학교에서 북쪽으로 500m가량 이동하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장생이녹색농촌체험마을’ 안내판이 가리키는 북쪽 비포장도로를 따라 다시 700m쯤 이동하면 ‘금계황준량선생추모비’가 나타난다. 추모비를 조금 지나, 좌측 산길을 따라 산기슭 사이로 100m가량 이동하면 영주금양정사가 자리 잡고 있다. 영주금양정사 왼편에는 욱양단소(郁陽壇所)가 있다.

[변천]

영주금양정사황준량이 만년에 학문을 강론하고, 수양할 수 있는 장수처로 삼고자 16세기 중반 무렵에 건립을 추진하였다. 황준량금양정사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은 시로 읊기도 하였다.

석두몽천출(石竇蒙泉出)[돌구멍에서 몽천이 솟아 나오고]

잔안금수개(孱顔錦樹開)[산에는 비단 빛 나무 펼쳐졌네]

추풍고산흥(秋風故山興)[가을바람에 고향 산천 흥겨워]

일취강선대(一醉絳仙臺)[강선대에서 흠뻑 취하였네]

황준량금양정사가 완공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일을 주관하던 승려 행사(行思)가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양정사는 퇴락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1566년(명종 21) 이황이 풍기를 지나다가 금양정사가 황폐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풍기군수 조완벽(趙完壁)에게 금양정사 수호 방안을 청원하게 된다. 인근 사찰의 승려들에게 금양정사 수호를 맡기는 대신, 그들에게 부과된 잡역을 면제해 주자는 것이었다. 풍기군수 조완벽도 이황의 청원을 받아들여, 인근 사찰에 금양정사 수호를 지시하는 체문[帖文]을 내렸다. 그 후 다시 금양정사는 황폐해지게 되고, 1595년(선조 28) 풍기군수 류운룡(柳雲龍)이 스승 이황의 유지를 받들어 다시 금양정사 수호를 지시하였다. 그리고 이황금양정사 수호를 청원하며 쓴 「금양정사완호기문(錦陽精舍完護記文)」의 발문을 직접 지었다.

금양정사는 병자호란 때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었다가, 1701년(숙종 27) 풍기군수 홍경렴(洪景濂)과 황준량의 후손들이 협력하여 중건하였고, 이후에도 몇 차례 보수가 이어졌다.

[형태]

영주금양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 3칸 중 온돌방 2통칸, 마루 2칸이 연이어 놓여있고, 전면과 좌측면에는 폭이 좁은 쪽마루를 깔아 놓았다. 비교적 높은 기단 위 온돌방에는 자연석 초석, 마루에는 원형주좌를 가진 초석을 두었으며,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현황]

영주금양정사는 2006년 9월 14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88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이에 앞서 1987년 영주금양정사 왼편에는 이황황준량을 제향한 욱양단소를 이건하였다. 욱양단소는 원래 욱양서원(郁陽書院)으로 1662년(현종 3) 옛 풍기군의 북쪽 10리, 지금 영주시 풍기읍 욱금리에 건립되었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복설되었는데, 원래 위치에 농업용 저수지인 금계호가 축조되면서, 금양정사 왼편으로 사당만 옮겨지었다. 이후 후손들은 영주금양정사와 욱양단소를 중심으로 황준량에 대한 추모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영주금양정사는 건축양식과 평면구성에서 조선시대 지방 사대부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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