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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556
한자 安珦
영어공식명칭 An Hyang
이칭/별칭 사온(士蘊),회헌(晦軒),안유(安裕),문성(文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위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243년연표보기 - 안향 출생
활동 시기/일시 1260년 - 안향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272년 - 안향 감찰어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275년 - 안향 상주판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77년 - 안향 판도좌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78년 - 안향 전중시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79년 - 안향 독로화 선발 및 국자사업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88년 - 안향 좌부승지 및 동지공거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89년 - 안향 낭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90년 - 안향 귀국
활동 시기/일시 1294년 - 안향 동남도병마사 및 지밀직사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95년 - 안향 밀직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96년 - 안향 삼사좌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97년 - 안향 첨의참리세자이보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98년 - 안향 계림부윤 임명
활동 시기/일시 1299년 - 안향 수국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00년 - 안향 도첨의찬성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03년 - 안향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04년 - 안향 우승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05년 - 안향 첨의중찬 치사
몰년 시기/일시 1306년연표보기 - 안향 사망
추모 시기/일시 1306년 - 안향 증시
추모 시기/일시 1318년 - 안향 영정 문묘 봉안
추모 시기/일시 1319년 - 안향 문묘 종사
추모 시기/일시 1542년 - 안향 백운동서원 제향
추모 시기/일시 1643년 - 안향 임강서원 제향
추모 시기/일시 1656년 - 영주 안향 향려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676년 - 안향 도동묘 제향
추모 시기/일시 1781년 - 안향 한천서원 제향
출생지 안향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안향 묘소 -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사당|배향지 소수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내죽리 152-8]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임강서원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사당|배향지 도동묘 -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사당|배향지 한천서원 - 경기도 개성시
사당|배향지 안자묘 - 경기도 의왕시 부곡공원길 3[월암동 425]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순흥(順興)
대표 관직 밀직사사도첨의중찬

[정의]

고려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안향(安珦)[1243~1306]은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한 문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되었다.

[가계]

안향의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안유(安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훗날 이름을 ‘안향’으로 고쳤지만, 조선의 5대 임금 문종과 휘가 같아 조선시대 저서에는 ‘안유’로 기록되어 있다. ‘회헌’이란 호는 송나라 주자를 흠모하여,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낸 안자미(安子美), 할아버지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증직된 안영유(安永儒)[1201~?], 아버지는 주리(州吏)로 의업(醫業)에 종사하다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른 안부(安孚)[1220~?], 어머니는 예빈승(禮賓承)을 지낸 우성윤(禹成允)의 딸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안향의 첫 번째 부인은 우사간(右司諫) 김녹연(金祿延)의 딸 한남김씨(漢南金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예빈경(禮賓卿)을 지낸 염수장(廉守藏)의 딸 서원염씨(瑞原廉氏)이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낸 안우기(安于器)[1265~1329]가 아들이다. 사위는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를 지낸 문욱(文頊),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지낸 허수(許绥), 통문서록사(通文署錄事)를 지낸 박제(朴璾), 직사관(直史館)을 지낸 한수연(韓守延), 정경공(貞景公) 김사원(金士元)[?~1319]이다.

[활동 사항]

안향은 1243년(고종 30) 흥주(興州) 평리촌(坪里村)[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출생하였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에 보임되었다가 직한림원으로 승진해 내시원에 소속되었다. 1270년(원종 11) 삼별초의 난 때 강화도에 억류되었다가 계책을 써서 탈출하니, 원종이 가상히 여겨 상을 내렸다. 1271년(원종 12) 서도(西道)에 파견되었는데, 청렴한 생활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이후 내시원에 재직하면서 내시원의 오랜 폐단을 임금께 보고해 혁파하였으며, 1272년 감찰어사로 승진하였다.

안향은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으로 부임했을 때 합주(陜州)[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백성들을 현혹하고 다니던 무당들이 오자, 무당들을 엄격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바로잡았다. 경상도안렴사가 고과 평정에서 안향을 표창하였고, 곧 판도좌랑으로 승진하였다. 1277년 판도좌랑, 1278년 전중시사를 거쳐 1279년 독로화(禿魯花)[뚤루게]에 선발되어 국자사업으로 승진하였다. 1279년 3월 대방공(帶方公) 징(瀓)을 따라 원나라에 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로 돌아온 안향은 우사의대부를 거쳐, 1288년(충렬왕 14) 좌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1288년 9월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1289년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정동행성원외랑에 임명되었고, 곧 낭중에 올랐다. 1289년 11월 원나라에 가는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세자를 수종하였는데, 1290년 귀국할 때 주자서를 필사하고 공자, 주자의 초상화를 모사하여 돌아왔다. 1292년 충렬왕이 질환이 있자 안향의 집에 머물렀으며, 1293년에는 제국대장공주가 안향의 집에 머물렀다. 1293년 원나라 세조가 충렬왕에게 추충선력정원(推忠宣力定遠)의 공신호를 내렸는데, 안향이 시를 지어 하례하자 미(米) 50석을 하사하였다. 1294년(충렬왕 20) 부지밀직사사로 동남도병마사를 제수받아 합포에 출진하였으며, 합포에서 안향은 군사들을 위무하고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1294년 지공거로 동지공거 민지(閔漬)[1248~1326]와 함께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 1297년 첨의참리세자이보에 각각 임명되었다.

안향은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참지기무 행동경유수 집현적대학사 계림부윤(參知機務行東京留守集賢殿太學士鷄林府尹)으로 임명되었다. 8월 충선왕과 계국공주가 원나라에 들어갈 때 호종하였다. 1299년 충렬왕이 복위한 뒤 수국사로 승진하였다. 1300년(충렬왕 26) 도첨의찬성사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권력을 잡은 오기(吳祁)[1259~1336], 석천보(石天補) 등의 무고를 당하였다. 이때 첨의중찬으로 치사하였으나, 곧 찬성사로 복직하였다. 1301년 국자감이 수차례의 병화로 허물어지자, 안향은 자신의 저택을 국가에 바치고 서부 양온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토지와 남녀 노비 각 100명을 국자감에 귀속시켰다. 안향은 교육기관이 날로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관료들에게 차등 있게 은과 포를 내게 하여,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섬학전(贍學錢)으로 삼자고 양부(兩部)에 건의하였다.

안향은 1303년(충렬왕 29) 국학박사 김문정(金文鼎)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공자와 십철(十哲)의 초상, 문묘 제기, 악기, 6경 및 제자사서(諸子史書)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 이산(李㦃), 이진(李瑱)[1244~1321]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로 삼았다. 이때 금내학관(禁內學館), 내시(內侍), 삼도감(三都監), 오고(五庫)의 관리, 그리고 7관(七管), 12도(十二徒)의 생도 중 경서 수업을 받은 자가 거의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안향은 1303년 12월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고, 1304년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 생활을 마쳤다.

[학문과 저술]

안향의 사적(事蹟)을 모은 『회헌실기(晦軒實記)』는 모두 네 차례 간행되었다. 첫 번째는 1763년(영조 39) 안향의 17대손 안극권(安克權)이 유집사실(遺什事實), 세계비지(世系碑誌), 제현기술(諸賢記述) 등을 편집하여, 1766년에 간행하였다. 이것을 ‘도동본실기(道東本實記)’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1816년(순조 16) 안재묵(安在默) 등이 증보한 것으로, 이때 안향의 연보도 완성되었다. 세 번째는 안명렬(安明烈) 등이 1883~1884년 사이에 간행한 것인데, 이를 ‘태학본실기(太學本實記)’라고 한다. 네 번째는 1909년 후손과 사림이 합의하여 간행한 것이다. 경상남도 진주 연산(硯山) 소장의 목판본으로 이를 ‘연산본실기’라고 부른다. 실기는 5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소]

안향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대덕산에 있는데, 안향 사후에 충렬왕이 내린 장지이다.

[상훈과 추모]

안향이 1306년(충렬왕 32) 세상을 떠나자, 충렬왕이 ‘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장례를 치를 때 7관과 12도의 유생들이 소복을 하고 노제를 지냈다고 한다. 1318년(충숙왕 5) 왕명으로 원나라 화공에게 안향의 영정을 제작하게 하여, 문묘에 봉안하였다. 훗날 흥주의 수령 최림(崔琳)이 이 영정을 모사하여 흥주향교에 봉안하였는데 이것이 국보 제111호로 지정된 안향 초상이다. 1319년 조정에서 안향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때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안향의 문생 신천(辛蕆)[?~1339]이 힘껏 주청하여 종사가 이루어졌다.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모방하여, 안향을 제향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였다. 백운동서원은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 받게 된다. 1643년(인조 21)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의 임강서원(臨江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656년(효종 7)에는 14세손 안응창(安應昌)[1603~1680]이 안향의 출생지인 지금의 순흥면 석교리영주 안향 향려비(榮州安珦鄕閭碑)[문화재자료 제611호]를 세웠다. 1676년(숙종 2)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의 도동묘(道東廟)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1781년(정조 5) 경기도 개성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안향의 신위를 봉안한 안자묘(安子廟)는 원래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에 있었는데, 6.25전쟁 때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천동으로 옮겨졌다가, 1975년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으로 다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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