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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559
한자 安軸
영어공식명칭 An Chuk
이칭/별칭 당지(當之),근재(謹齋),문정(文貞),흥녕군,흥녕부원군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위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282년연표보기 - 안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07년 - 안축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24년 - 안축 원나라 제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30년 - 안축 강릉도존무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32년 - 안축 전법판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39년 - 안축 감찰대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40년 - 안축 동지공거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43년 - 안축 상주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344년 - 안축 밀직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45년 - 안축 찬성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47년 - 안축 정치도감판사 임명
추모 시기/일시 1347년 - 안축 흥녕군 책봉
추모 시기/일시 1348년 - 안축 흥녕부원군 책봉 및 증시
몰년 시기/일시 1348년연표보기 - 안축 사망
추모 시기/일시 1544년 - 안축 소수서원 추향
추모 시기/일시 1545년 - 안축 사현정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656년 - 안축 사현정비 중수
묘소|단소 안축 묘소 -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전재리
사당|배향지 소수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내죽리 152-8]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순흥(順興)
대표 관직 밀직부사|판정치도감판사

[정의]

고려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안축(安軸)[1282~1348]은 고려 문과와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였으며, 밀직부사, 정치도감판사 등을 지냈다.

[가계]

안축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안득재(安得財), 할아버지는 안희서(安希諝)로 모두 흥녕현(興寧縣)[지금의 영주시 순흥면]의 호장(戶長)을 지냈다. 아버지 안석(安碩)도 호장을 지냈으며, 과거에 급제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검교군기감을 지낸 안성기(安成器)의 딸이다. 형제로는 안헌(安軒), 밀직제학을 지낸 안보(安輔)[1302~1357], 성균관좨주를 지낸 안집(安輯), 안을수(安乙壽)가 있다. 부인은 검교군기감 문귀(文龜)의 딸로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보마배행수별장(寶馬陪行首別將)을 지낸 안종기(安宗基)와 문하찬성사를 지낸 안종원(安宗源)[1325~1394]이고, 사위는 봉원군 정양생(鄭良生)[?~1392]이다.

[활동 사항]

안축은 1307년(충렬왕 33) 문과에 급제하여 금주사록에 선임되었으며, 이후 예문춘추관의 검열과 수찬, 사헌규정, 단양부주부 등을 역임하였다. 1324년(충숙왕 11)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요양로개주판관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당시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이때 충숙왕을 위해 힘껏 구명하였으므로, 충숙왕이 안축을 가상히 여겨 성균악정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우사의대부를 거쳐 1330년(충혜왕 즉위년) 강릉도존무사에 임명되었다. 내직으로 돌아온 뒤에는 판전교지전법사에 임명되었으나, 1332년(충숙왕 복위 1) 충숙왕이 충혜왕의 총애를 얻은 자들을 모두 배척하면서 안축도 파직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복직하였는데, 이번에는 당시 전횡을 일삼던 한 환관의 뜻에 거슬려 파직되었다.

안축은 1339년(충혜왕 복위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전법판서와 감찰대부에 보임되었다. 악정으로부터 감찰대부에 이르기까지 항상 관직을 겸하였는데, 비록 헌부의 책임자였지만 관직을 띠고 있었기에 표전(表箋)과 사명(詞命) 대부분이 안축의 손에서 나왔다. 1340년 동지공거가 되어 지공거 김영돈(金永旽)[1285~1348]과 과거를 주관하였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검교평리로 상주목사를 겸하였다. 이때 안축은 고향 흥녕현에 왕래하며 노모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안축은 1344년(충목왕 즉위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밀직부사를 거쳐 정당문학에 올랐다. 1345년 첨의평리, 찬성사, 우문관대제학 및 감춘추관사를 지냈다. 1347년 정치도감판사가 되어 토지의 탈점과 겸병을 조사하고, 폐단들을 적발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기황후(奇皇后)의 동생 기삼만(奇三萬)[?~1347]이 옥사하자, 정동행성이문소에서 정치관들을 구속하고 국문하였다. 이때 안축은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특별히 구속은 면하였다. 1347년 가을 흥녕군에 봉해졌으며, 겨울에 복직하였다. 1348년(충목왕 4) 다시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봉해졌다.

[학문과 저술]

안축의 문집으로 4권 2책의 『근재집(謹齋集)』이 전한다. 『근재집』에는 1330년 강릉도존무사로 부임했을 때 지은 시문집 「관동와주(關東瓦注)」를 비롯해 경기체가 작품인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이 수록되어 있다. 1346년(충목왕 2)에는 이제현(李齊賢)[1287~1367] 등과 더불어 민지(閔漬)[1248~1326]의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수정, 보완하였으며,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묘소]

안축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전재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안축이 1348년 세상을 떠나자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544년(중종 39)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안축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소재]에 추향하였으며, 1545년(인종 1)에는 안축의 본가에 안석, 안축, 안보, 안집을 기리는 사현정비(四賢井碑)[영주시 순흥면 읍내리]를 세웠다. 사현정비는 1656년(효종 7) 의령현령이었던 안응창(安應昌)[1603~1680]에 의해 중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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