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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569
한자 鄭道傳
영어공식명칭 Jeong Do-jeon
이칭/별칭 종지(宗之),증오(曾吾),삼봉(三峰),문헌(文憲),봉화백(奉化伯)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고려/고려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위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42년연표보기 - 정도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360년 - 정도전 성균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362년 - 정도전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363년 - 정도전 충주사록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64년 - 정도전 전교주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65년 - 정도전 통례문지후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70년 - 정도전 성균박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71년 - 정도전 태상박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75년 - 정도전 유배
활동 시기/일시 1383년 - 정도전 함주막사 방문
활동 시기/일시 1384년 - 정도전 서장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85년 - 정도전 성균관좨주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88년 - 정도전 밀직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89년 - 정도전 수충논도좌명공신 녹훈
활동 시기/일시 1390년 - 정도전 동판도평의사사 겸 성균대사성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91년 - 정도전 유배
활동 시기/일시 1392년 - 정도전 충의군 책봉
활동 시기/일시 1392년 - 정도전 분의좌명개국공신 녹훈
활동 시기/일시 1397년 - 정도전 동북면도선무순찰사 임명
몰년 시기/일시 1398년연표보기 - 정도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65년 - 정도전 복권
추모 시기/일시 1870년 - 정도전 증시
추모 시기/일시 1912년 - 정도전 문헌사 제향
추모 시기/일시 1922년 - 정도전 모현사 제향
거주|이주지 정도전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431 지도보기
유배|이배지 정도전 유배지 - 전라남도 나주시
묘소|단소 정도전 단소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사당|배향지 모현사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로 229-38[신암리 1259-2]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문헌사 -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길 80-15[은산리 183]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봉화(奉化)
대표 관직 문하시랑찬성사|동북면도선무순찰사|성균관제조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와 더불어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를 대표하는 인물로 이성계(李成桂)[1335~1408]를 도와 조선 개창을 주도하였다.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작위는 봉화백(奉化伯)이다.

[가계]

정도전의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증오(曾吾), 호는 삼봉(三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비서랑동정 정영찬(鄭英粲), 할아버지는 검교군기감 정균(鄭均),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1305~1366], 어머니는 우연(禹淵)의 딸 단양우씨(丹陽禹氏)이다. 동생은 참판을 지낸 정도존(鄭道存)과 한성판윤을 지낸 정도복(鄭道復)[1351~1435]이며, 매제는 공조판서를 지낸 황유정(黃有定)[1343~?]이다. 부인은 최습(崔隰)의 딸 경주최씨(慶州崔氏)로 경숙택주(慶淑宅主)에 봉해졌다. 아들은 형조판서를 지낸 정진(鄭津)[1361~1427]과 소윤 정영(鄭泳)[?~1398]이다.

[활동 사항]

정도전은 1362년(공민왕 11) 문과에 급제하였고, 1363년 충주사록에 임명되었다. 이후 전교주부, 통례문지후 등을 지냈으며, 1366년 부모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당시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위해 공사를 크게 벌이고 백성들을 많이 동원해 원성이 자자하였는데, 이때 정도전이 「원유가(遠遊歌)」를 지어 풍자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성균박사에 제수되어 정몽주와 함께 학생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 1371년 태상박사로 특진하였으며, 곧 예의정랑으로 옮겨 성균, 태상 두 곳의 박사를 겸직하였다.

정도전은 1375년(우왕 1) 성균사예, 예문응교,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당시 권신이었던 이인임(李仁任)[?~1388], 경복흥(慶復興)[?~1380] 등이 원나라를 다시 섬기려 하자 강력히 반대하였다. 결국, 정도전은 북원 사신의 영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에 유배되었다. 1377년 고향 영주로 옮겨졌으며, 4년 후 개경 밖에서는 마음대로 살 수 있게 허락을 받아, 삼각산 밑에 집을 짓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도전은 1383년(우왕 9)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의 함주막사로 찾아가 뜻을 함께하기로 하였다. 1384년 전교부령으로 서장관이 되어 성절사 정몽주를 따라 명나라를 다녀왔다. 1385년 성균좨주에 임명되었고, 곧 남양부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대사에 올랐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당하고, 창왕이 즉위하자 서연의 시독을 거쳐, 밀직부사에 발탁되었다. 1388년 지공거로 임명되어 동지공거 권근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였다. 1389년(창왕 1) 이성계 등이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 봉화현(奉化縣)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지고, 수충논도좌명공신(輸忠論道佐命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삼사우사에 임명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정몽주 등과 함께 경연을 맡았다. 1390년 정당문학에 임명되었으며,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무고 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어 정당문학 동판 도평의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올랐고, 1391년에는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1391년 조준(趙俊)[1346~1405] 등과 더불어 과전법(科田法)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반대파의 참소로 봉화현으로 유배되었다가, 직첩과 녹권을 회수당하고 나주로 옮겨졌다. 1392년 유배지에서 풀려나 고향 영주 지역으로 돌아왔다.

정도전이 고향으로 돌아올 무렵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하여 병석에 있었는데, 정몽주 등 고려왕조를 지키고자 했던 세력들은 이를 기회로 삼아 이성계 일파를 공격하였다. 이에 정도전도 보주(甫州)[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감옥에 투옥되었지만, 이방원(李芳遠)[1367~1422]에 의해 정몽주가 제거되자 곧 유배에서 풀려났다. 1392년 7월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을 건국하였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 1등공신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승록대부 문하시랑찬성사 동판 도평의사사사 판호조사 겸 판상서사사 보문학제학사 지경연 예문춘추관사 겸 의흥친군위절제사 봉화백에 책봉되어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잡았다. 겨울에는 하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정도전은 1394년(태조 3) 판의흥삼군부사로 경상, 전라, 양광삼도도총제사가 되어 재정 및 지방의 병권을 장악하였다. 1392년 진행된 한양천도를 주도하였으며, 1395년 10월 새 궁궐과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의 명으로 궁궐의 모든 전(殿), 문(門)을 비롯해 도성 49방(坊) 등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 1396년 이른바 표전문(表箋文) 문제로 명나라와 갈등이 극단에 치닫게 되고,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군량미 확보와 진법 훈련 등을 진행하는 등 요동 정벌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병 혁파 및 군사 지휘권 문제로 왕자들과의 갈등이 심해졌다. 1397년 동북면도선무순찰사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 함흥에 있던 목조(穆祖)[?~1274]의 덕릉(德陵)과 공효왕후(恭孝王后)의 안릉(安陵)을 수리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고을의 경계선 확정, 성보 수리, 참호 설치 등 동북면 개척에 힘썼다. 1398년(태조 7) 권근과 더불어 성균관제조에 임명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을 모아 경사를 강습하였다. 1398년 9월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 세력에 의해 주살되었다.

[학문과 저술]

정도전은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다방면의 저서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심문천답(心問天答)』, 『심기리편(心氣理篇)』,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은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이 정학임을 밝힌 철학서이다. 「문덕곡(文德曲)」,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籙)」 등 악사(樂詞) 3편은 이성계의 창업을 칭송한 노래이다. 정도전의 경세론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경제의론(經濟議論)」을 통해 알 수 있다. 「감사요약(監司要約)」에는 전라도관찰사로 나가던 판중추사 이무(李茂)[1355~1409]에게 준 것으로 감사의 연혁과 득실, 고과법 등이 기록되어 있다. 『국초군영진적(國初群英眞蹟)』은 국초 명신들의 필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진적을 모아 첩으로 만든 것이다. 『팔진36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 『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 『강무도(講武圖)』, 『진법(陣法)』 등은 병법에 관한 내용이다. 그 외 의서로는 『진맥도결(胗脈圖訣)』, 역산서로 『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과 『상명태을제산법(詳明太乙諸算法)』 등이 있다. 또한 정총(鄭摠) 등과 함께 편년체의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하였다. 하지만 위의 저서 중 상당수는 유실되었고, 일부만 문집 등에 산재하여 있다.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은 1397년(태조 6) 정도전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정도전의 아들에 의하여 2권으로 간행되었다. 그 뒤 1465년(세조 11) 증손자 정문형(鄭文炯)[1427~1501]에 의해 6책으로 중간되고, 1486년(성종 17) 8책으로 증보되었다. 지금 전하는 14권 7책의 『삼봉집』은 1791년(정조 15) 왕명으로 간행한 것이다.

[묘소]

정도전의 묘소는 실전되었고, 후손들이 조성한 단소가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도전은 조선왕조 개창을 주도한 공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으로 녹훈되고 봉화백의 작위를 받았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주살 당함으로써 모두 박탈당하였다. 나아가 1411년(태종 11)에는 폐서인이 되었다. 정도전의 복권이 이루어진 것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였다. 정도전의 공로를 인정했던 흥선대원군에 의해, 1865년(고종 2) 대비 조씨가 공신 칭호를 돌려주었으며, 1870년에는 고종이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1922년 후손들이 정운경 묘소 아래에 모현사(慕賢祠)[영주시 이산면 신암리]를 짓고 정운경정도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에 앞서 1912년에는 문헌사(文憲祠)[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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