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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597
한자 金玏
영어공식명칭 Kim Reuk
이칭/별칭 희옥(希玉),백암(栢巖),민절(敏節)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0년연표보기 - 김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64년 - 김륵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76년 - 김륵 식년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84년 - 김륵 영월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89년 - 김륵 홍문관교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0년 - 김륵 홍문관수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김륵 영남안집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3년 - 김륵 경상우도관찰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93년 - 김륵 성균관대사성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4년 - 김륵 홍문관부제학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5년 - 김륵 체찰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8년 - 김륵 성균관대사성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99년 - 김륵 충청도관찰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02년 - 김륵 동지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04년 - 김륵 안동부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10년 - 김륵 강릉부사 좌천
활동 시기/일시 1612년 - 김륵 삭탈관직
몰년 시기/일시 1616년연표보기 - 김륵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21년 - 김륵 향현사[구강서원] 제향
추모 시기/일시 1653년 - 김륵 자헌대부 이조판서 증직
추모 시기/일시 1788년 - 김륵 ‘민절’ 증시
출생지 김륵 출생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부임|활동지 김륵 부임지 - 강원도 영월군
부임|활동지 김륵 부임지 - 경상북도 안동시
묘소|단소 김륵 묘소 -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가곡리
사당|배향지 구강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선성(宣城)
대표 관직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홍문관부제학|동지사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김륵(金玏)[1540~1616]은 문과 급제 후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황(李滉)[1501~1570]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가계]

김륵의 본관은 예안(禮安)[선성(宣城)],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 시호는 민절(敏節)이다. 아버지는 생원 김사명(金士明), 어머니는 창원황씨(昌原黃氏)인데, 형조좌랑을 지낸 큰아버지 김사문(金士文)[1502~1549]과 큰어머니인 생원 장응세(張應世)의 딸 증 정부인 인동장씨(仁同張氏)에게 출계하였다. 할아버지는 증 승정원좌승지 김우(金佑), 증조할아버지는 생원 김만칭(金萬秤)이다. 부인은 사옹원주부를 지낸 장순희(張順禧)[1508~1545]의 딸 정부인 인동장씨이다.

[활동 사항]

김륵은 1540년(중종 35)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북쪽 백암리(栢巖里)[지금의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서 출생하였다. 13세 때 박승임(朴承任)[1517~1586]과 황준량(黃俊良)[1517~1563]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8세 때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륵은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1576년(선조 9)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검열, 홍문관부수찬,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대간으로 있으면서는 직언과 정론을 피하지 않았고, 홍문관에 있을 때는 선조의 행실과 시정의 잘못된 점을 직설하였다. 1584년(선조 17)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구해 영월군수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 영월에서 죽은 노산군(魯山君)[단종]의 무덤을 찾아가 치제하였으며, 노산군의 시신을 거둔 자의 자손을 찾아 복호(復戶)해 주었다. 또 고을의 폐단을 찾아 상소문을 올리니, 선조가 옷 한 벌을 하사하고 교서를 내려 표창하였다. 영월군의 백성들도 선정비를 세워 김륵의 치적을 기렸다.

김륵은 1589년 홍문관교리에 올랐으며, 1590년에는 홍문관수찬 등에 제수되었다. 당시 선조는 김륵을 총애하여 홍문관의 자리가 빈다면 김륵 같은 사람을 바로 충원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 여러 선비가 죽임을 당하였는데, 진주에 거주하던 처사 최영경(崔永慶)[1529~1590]도 길삼봉(吉三峰)으로 지목되어 옥사하였다. 이때 김륵은 최영경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선조의 비위를 거슬러 호군으로 좌천되었지만, 곧 돌아와 형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김륵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안집사에 임명되었다. 경상도로 내려온 김륵은 충의(忠義)를 격려하는 포고문을 작성해 각 고을에 하달하였고, 이에 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또 인재를 골라 여러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하여 경내에 있는 적군을 막게 하였다. 사람들은 김륵이 없었다면 죽령 이북의 제천과 원주 지역이 모두 적군의 수중에 떨어졌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특히 김륵김개국(金蓋國)[1548~1603]과 황서(黃曙)[1554~1603]를 각각 영천과 풍기의 의병장으로 삼고, 봉화의 군사를 보내 영주 지역을 보전케 하였다. 1593년에는 경상우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선조는 교서를 내리면서 흩어진 경상도의 백성들을 불러 모아 의병을 일으킨 것은 모두 김륵의 공이라고 하였다. 1594년 성균관대사성에 올랐다.

김륵은 1594년 사헌부대사헌, 이조참판을 거쳐 홍문관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 무렵 김륵은 홍문관부제학으로 있으면서 기축옥사를 주도한 정철(鄭澈)[1536~1593]을 논핵하였다. 1595년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차자를 올려 나라의 기반을 회복시키기 위한 열여섯 가지 일을 진달하였다. 이어 체찰부사가 되어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를 순찰하던 중, 어머니 장부인이 세상을 떠나 자리에서 물러났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김륵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사재를 내어 의병을 일으키는데 제공하였다. 또 여러 고을에 격문을 띄워 창의를 촉구하였다. 조정에서는 김륵에게 교서를 내려 안집사로 기복(起復)[부모의 상중에 관직에 나가는 것] 할 것을 지시하였지만, 상을 마치게 해 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김륵은 1599년(선조 32)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며, 1602년에는 동지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갔다. 하례한 후 명나라 병부(兵符)가 군사 일을 묻자 명쾌하게 대답하니, 주위 관료가 모두 칭찬하였다. 이때 김륵은 명나라 신종(神宗)으로부터 서책, 비단, 벼루, 시초(蓍草)를 하사받았다. 귀국 후 다시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다. 1604년(선조 37) 안동부사로 부임하였는데, 1605년 큰 홍수가 일어나 수해가 극심하였다. 김륵은 관찰사에게 상신(上申)하여, 주변 고을의 장정을 동원해서 두 개의 큰 제방을 다시 쌓았다. 이로써 수해가 줄어드니 백성들이 송제사적비(松堤事蹟碑)를 세워 김륵의 공을 기렸다.

김륵은 1608년(광해군 즉위)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지만, 얼마 후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610년 한성좌윤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기축옥사로 죽임을 당한 이발(李潑)[1544~1589], 이길(李洁)[1547~1589], 백유양(白惟讓)[1530~1589], 정개청(鄭介淸)[1529~1590]의 신원과 동방오현(東方五賢)에 대한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청원하였다. 앞서 광해군은 자신의 생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삼고, 별묘를 ‘봉자전(奉慈殿)’이라 칭하였다. 김륵은 의절에 문제가 있음을 아뢰었다가 광해군의 미움을 받아 강릉부사로 좌천되었다. 1612년 김직재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때 죄수의 집에서 김륵을 지목하는 글이 나와, 김륵도 국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항복(李恒福)[1556~1618], 이덕형(李德馨)[1561~1613], 심희수(沈喜壽)[1548~1622] 등이 말려 삭직만 당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으로 내려온 후에는 관직에 더 뜻을 두지 않고 자연에 뜻을 둔 채 소요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륵의 문집으로 6권 4책의 『백암집(栢巖集)』이 전한다. 『백암집』에는 김륵이 관직 생활을 하면서 올렸던 각종 상소, 정문(呈文), 차자 등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 정치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묘소]

김륵의 묘소는 처음에는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 조성하였으나, 이후 봉화군 상운면 가곡리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624년(인조 2) 인조는 김륵을 선조 연간의 구신(舊臣)이라 하여 신하를 보내 치제하였으며, 1653년(효종 4)에는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이어 1788년(정조 12)에는 ‘민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김륵은 구강서원(龜江書院)에 제향되었다. 구강서원은 김륵을 비롯해 김담(金淡)[1416~1464], 박승임, 김영조(金榮祖)[1577~1648]를 제향 하는 서원으로 1615년(광해군 7) 세워진 향현사(鄕賢祠)에서 출발하였다. 처음에는 김담, 박승임을 제향하다가 1621년(광해군 13) 김륵을 추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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