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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33
한자 朴弘儁
영어공식명칭 Park Hong-jun
이칭/별칭 자경(子敬),괴천(槐川)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04년연표보기 - 박홍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26년 - 박홍준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35년 - 박홍준 증광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43년 - 박홍준 호조좌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47년 - 박홍준 진도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51년 - 박홍준 영광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53년 - 박홍준 사간원사간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55년 - 박홍준 사헌부집의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55년 - 박홍준 거제도 유배
몰년 시기/일시 1755년연표보기 - 박홍준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57년 - 박홍준 신원
거주|이주지 박홍준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수학지 부석사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48]지도보기
부임|활동지 박홍준 부임지 - 전라남도 진도군
부임|활동지 박홍준 부임지 - 전라남도 영광군
유배|이배지 박홍준 유배지 - 경상남도 거제시
묘소|단소 박홍준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권선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반남(潘南)
대표 관직 호조좌랑|영광군수|사헌부집의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박홍준(朴弘儁)[1704~1755]은 문과 급제 후 호조좌랑·영광군수·사헌부집의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가계]

박홍준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경(子敬), 호는 괴천(槐川)이다. 아버지는 생원 박태래(朴泰來)[1673~1738], 어머니는 강재필(姜再弼)[1654~1730]의 딸 진주강씨(晉州姜氏)와 이춘영(李春英)[1563~1606]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 할아버지는 박문린(朴文麟), 증조할아버지는 순릉참봉을 지낸 박충기(朴忠基)[1624~?]이다. 박홍준의 부인은 진사 이항배(李恒培)[1683~1736]의 딸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활동 사항]

박홍준은 17세가 되던 1720년(숙종 46) 부석사에서 독서하였는데, 부석사의 승려가 이황(李滉)[1501~1570]의 시를 거론하며 조사당 앞 선비화를 보고 “이 나무를 해치는 사람은 죽는다.”라고 하였다. 이에 박홍준은 “퇴계의 시는 중의 말을 그대로 적은 것일 뿐 그것을 믿은 것은 아니다. 이제 내가 이 나무를 꺾어 버릴 터인데, 만일 네 말이 옳으면 내가 천금 같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네 말이 증명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의 미혹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장도를 꺼내 잘라 버렸지만 무사했다는 일화가 『재향지(梓鄕誌)』에 전한다.

박홍준은 1726년(영조 2) 생원시, 1735년(영조 11)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743년(영조 19) 승정원주서로 있으면서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고 사퇴하였다. 승정원의 관직은 청선(淸選)의 자리인데 박홍준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부름을 받아 1743년 호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후 양사(兩司)의 관원으로 거듭 제수되었다. 박홍준은 1747년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상소문을 올려 왕실의 폐단과 관료 임용에서의 부조리를 말하였다. 이에 앞서 영조는 붕당(朋黨)의 악습을 일소하기 위하여 요직인 예문관과 이조전랑의 자천권 및 통청권을 폐지하였다. 박홍준은 이 때문에 인사에서 요행을 바라는 자들이 늘어났고, 또 종척(宗戚)인 김상복(金相福)[1714~1782]·이익정(李益炡)[1699~1782] 및 대신들에게 검증 절차 없이 성급히 관직을 내리고 있음을 말한 것이었다. 오히려 영조는 당습(黨習)에 젖어 있다는 이유로 박홍준을 진도군수로 출척하고 말았다. 1751년(영조 27)에는 영광군수로 부임하였으며, 1753년에는 사간원사간에 올랐다.

박홍준은 1755년 사헌부집의에 제수되었다. 당시 정국은 나주괘서사건에 이어 토역경과정시(討逆慶科庭試)에서 심정연(沈鼎衍)[?~1755]이 불온한 답안을 써서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고향인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에 있던 박홍준은 사헌부집의에 제수되자 상경한 후 바로 사직하였다. 그러면서 영조에게 역적 토벌 후 어수선해진 민심 수습 및 민생 안정과 관련된 방안을 상소하였다.

[묘소]

박홍준의 묘소는 영주시 문수면 권선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박홍준은 1757년(영조 33) 신원과 함께 관작이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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