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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71
한자 鄭玉
영어공식명칭 Jeong Ok
이칭/별칭 자성(子成),우천(牛川)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94년연표보기 - 정옥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25년 - 정옥 사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27년 - 정옥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28년 - 정옥 창의
활동 시기/일시 1731년 - 정옥 율봉도찰방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34년 - 정옥 황해도도사 겸 경차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35년 - 정옥 낙향
활동 시기/일시 1742년 - 정옥 보령현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46년 - 정옥 시무5조 개진
활동 시기/일시 1749년 - 정옥 소수서원 원장 임명
활동 시기/일시 1751년 - 정옥 철성판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56년 - 정옥 영해부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59년 - 정옥 황해도관찰사 제수
몰년 시기/일시 1760년연표보기 - 정옥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32년 - 정옥 오천서원 제향
출생지 정옥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소천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정옥 부임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부임|활동지 정옥 부임지 - 강원도 철원시
부임|활동지 정옥 부임지 - 충청남도 보령시
묘소|단소 정옥 묘소 -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상리
사당|배향지 오천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청주(淸州)
대표 관직 황해도관찰사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정옥(鄭玉)[1694~1760]은 무신난 때 영주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소수서원 원장을 역임하여 학문 진작에 힘썼다. 오광운(吳光運)[1689~1745]과 권상일(權相一)[1679~1759]은 정옥을 영남 제일의 인물로 평가하였다.

[가계]

정옥의 자는 자성(子成), 호는 우천(牛川),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정옥의 5대조는 좌의정을 지낸 정탁(鄭琢)[1526~1605], 고조할아버지는 증 집의 정윤저(鄭允著), 증조할아버지는 증 이조참의 정시영(鄭時英), 할아버지는 정집(鄭輯), 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정석제(鄭碩濟), 어머니는 김융(金隆)[1549~1593]의 현손인 통덕랑 김정휘(金鼎輝)의 딸 증 정부인 함창김씨(咸昌金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연원부원군 이광정(李光庭)[1552~1627]의 현손인 통덕랑 이명(李溟)의 딸 증 정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청백리 성이성(成以性)[1595~1664]의 증손자인 호군 성세진(成世瑨)의 딸 증 정부인 창녕성씨(昌寧成氏)이다.

[활동 사항]

정옥은 1694년(숙종 20) 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소천리에서 출생하였다. 1725년(영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7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728년 무신난이 일어나자 영주 지역 의병의 부장(部將)으로 임명되었다. 1730년 권지승문원정자가 되었고, 1731년 율봉도찰방으로 부임하였다. 부임지에서 봉록을 덜어 역졸의 구황 사업에 진력하여 말 한 필을 상사 받았다.

정옥은 1733년(영조 9)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1734년 황해도도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시험을 감독하고 전답을 조사하는 임무를 겸하였는데, 청탁을 거부하고 공무를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1737년 지평이 되었으나 아버지의 병간호를 이유로 사임하였다. 이후에도 경성판관,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42년(영조 18) 보령현감에 임명되고, 1750년 통훈대부에 올랐다. 1751년(영조 27) 철성판관으로 부임하여 기민을 구휼하였다. 1753년 통정대부로 승진하였고, 온성·울산·이산(理山) 등의 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정옥은 1756년 영해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중 선정을 베풀고 농사를 권장하는 한편, 삭망제강법(朔望製講法)을 통해 고을의 학문을 진흥시켰다. 이에 수령 전최(殿最)에서 상등에 들어 1759년 황해도관찰사에 올랐다. 1760년(영조 36) 12월 4일 임소의 선화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정옥은 권두경(權斗經)[1654~1725]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문집으로 7권 4책의 『우천집(牛川集)』이 전한다. 문집에는 지방관 시절 임지에서 명승을 방문하고 지은 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또 황해도관찰사 재임 시 올린 사직소가 8편이나 수록되어 있는데, 사직소에는 남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조의 신임으로 관찰사에 임명된 것에 대해 정치적으로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음이 나타난다.

[묘소]

정옥의 묘소는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상리 금숙산(錦繡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종로(鄭宗魯)[1738~1816]가 행장,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묘갈명, 김굉(金㙆)[1739~1816]이 묘지명을 각각 지었다. 정옥은 1832년(순조 32) 오천서원(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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