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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12
한자 金爾音
영어공식명칭 Kim I-eum
이칭/별칭 백옥(伯玉),삼로(三路)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374년 - 김이음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01년 - 김이음 우사간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05년 - 김이음 강원도관찰사 부임
몰년 시기/일시 1409년연표보기 - 김이음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54년 - 김이음 삼봉서원 제향
추모 시기/일시 1959년 - 김이음 효자각 이건
거주|이주지 김이음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김이음 묘소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사당|배향지 삼봉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효자
성별
본관 함창(咸昌)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출신의 문신이자 효자.

[개설]

김이음(金爾音)[?~1409]은 우사간·진양대도호부사·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효행으로 정려되었다.

[가계]

김이음의 본관은 함창(咸昌), 자는 백옥(伯玉), 호는 삼로(三路)이다. 아버지는 좌우위정용낭장을 지낸 김중서(金重瑞), 어머니는 군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 할아버지는 문하평리를 지낸 김귀(金龜), 증조할아버지는 좨주를 지낸 김중정(金中正)이다. 부인은 판전농시사를 지낸 박광비(朴光庇)의 딸 영해박씨(寧海朴氏)이다.

김이음의 선대는 개성에 거주하였으나, 고려 말 아버지 김중서가 절의를 지키고자 동생들과 함께 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실내[新川]로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함창김씨 가문이 영주 일대에 세거하게 되었다.

[활동 사항]

김이음은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6년(우왕 2) 예문검열로 있으면서 미리 상소문을 작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순군옥에 수감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이후 지평·문하사인을 지냈고, 새 왕조가 개창된 후에도 등용되어 1401년(태종 1) 우사간에 제수되었다. 1402년 간관으로 있으면서 소요산에 머물고 있던 태조의 환궁을 건의하였다. 1405년에는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이외에도 김이음은 정언·헌납·집현전직제학·진양대도호부사·선산부사·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김이음은 이색(李穡)[1328~1396]·김구용(金九容)[1338~1384]·권근(權近)[1352~1409] 등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권근이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의 발문을 썼으며, 1397년 진양대도호부사로 있으면서 초간본을 진주에서 간행하였다.

김이음은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부모 봉양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수시로 찾아뵙고 문안을 드렸다. 진양대도호부사 재임 중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유가의 예법에 따라 시묘살이를 하며 삼 년 동안 매일 세 차례 성묘하였다. 그래서 성묘하는 길에 세 갈래의 길이 생겼는데, 가운데가 발자국 길, 양옆이 지팡이 자국으로 된 길이였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은 김이음을 ‘삼로선생(三路先生)’이라고 불렀다. 태종이 이를 듣고 김이음의 효행을 정려하였다.

[묘소]

김이음의 묘소는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이음은 1654년(효종 5) 삼봉정사(三峯精舍)에 제향되었다. 삼봉정사는 1700년(숙종 26) 삼봉서원[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으로 승격되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된 후 복설되지 않았다. 김이음은 효성으로 정려되었는데, 선조 연간 효자각을 중창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고, 1959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의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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