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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44
한자 姜宅鎭
영어공식명칭 Gang Taek-jin
이칭/별칭 하연(何然)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2년연표보기 - 강택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강택진 주비원 재무위원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강택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3년 1월 - 강택진 풍기소작조합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3년 2월 - 강택진 고려공산동맹 중앙위원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3년 9월 - 강택진 조선노농대회준비위원회 발기
활동 시기/일시 1924년 4월 - 강택진 조선노농총동맹 창립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24년 12월 - 강택진 경북사회운동자간친회 참석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강택진 경북사회운동자동맹 준비위원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26년연표보기 - 강택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27년 - 강택진 추도식 개최
추모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강택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거주|이주지 강택진 거주지 - 경기도 개성시
거주|이주지 강택진 이주지 -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강택진 이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풍기소작조합 위원장|조선노농총동맹 창립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의 독립운동가.

[개설]

강택진(姜宅鎭)[1892~1926]은 1917년부터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고려공산청년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에서 활동하였다.

[가계]

강택진의 호는 하연(何然)이다. 아버지 강재기(姜在琦)[1857~1938]와 어머니 김열(金烈)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풍기소작조합 위원장을 지낸 강응진(姜應鎭)이 형이다.

[활동 사항]

강택진은 개성 출신으로 서울에서 살다 『정감록(鄭鑑錄)』에 따라 영주 풍기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풍기 지역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 중 하나였기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1917년 강택진은 중국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봉천(奉天)의 해천양행(海天洋行)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1919년 2월 초 독립자금과 관련해 잠시 서울로 돌아온 강택진은 얼마 후 다시 중국 봉천으로 건너가, 길림군정사를 지원할 목적으로 결성된 주비원의 재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두 달 만에 운동 노선의 차이를 느껴 사임하고, 서울에 머물면서 전국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을 경험하였다.

1919년 4월 강택진은 외교·언론·선전을 통한 독립 방안을 모색하였고, 그 과정에서 현정근(玄貞根)을 만나 운동자금 200원을 제공해 주었다. 1920년 10월 서울 가회동 취운정(翠雲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연통제 기관으로 조선13도총간부를 조직하고, 교섭부를 맡아 경상북도에서 애국금 3,000원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1921년 3월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1922년 5월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건강 악화로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풍기로 돌아온 강택진은 1923년 1월 풍기소작조합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3년 4월 “지주권을 포기하고 소작인 제군에게 고백하노라”라는 글을 남기고, 자신의 토지 9,000여 평을 풍기소작조합에 기부하였다. 이에 대해 “… 수일 전 경상북도 지방에서는 아직 꿈 가운데 있는 지주들에게 정문일침(頂門一針)되는 사실이 있었다. …”라는 신문 보도가 나기도 했다. 강택진은 자신의 토지를 기부한 뒤 서울로 올라가 중학동의 어느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면서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며 생활하였다. 강택진은 인터뷰를 요청한 신문 기자에게 ‘박애·평등·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유욕’을 버리고 ‘참사람’의 ‘참살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전 재산을 기부한 것이라고 발언하였다.

1923년 9월 전조선노농대회준비위원회 발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경상도를 맡아 노농운동단체의 가입에 주력하고, 1923년 10월 조선노동대회준비회를 결성하였다. 또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의 창립을 주도하였으며, 중앙집행위원과 상무집행위원을 맡았다.

이에 앞서 강택진은 1923년 2월 서울계의 비밀공산주의 그룹인 고려공산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 10월 조직 개편 때 검사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4년 12월 사회주의자동맹의 창립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서울계의 지방 확산 활동으로 1924년 12월 예천에서 열린 경북사회운동자간친회에 참석하였으며, 1925년 2월 경북사회운동자간친회를 통해 도 단위 운동 지도기관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강택진은 경북사회운동자동맹을 발기하고, 준비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강택진은 1925년 2월 말 경북사회운동자간친회를 보도한 신문지국장에 대한 협박 혐의로 구금된 뒤, 1925년 4월 재판에 넘겨졌다. 1925년 5월 3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언도받았고, 1926년 2월 출옥하였다. 출옥 후 조선상동맹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1926년 7월 풍기로 돌아와 요양하던 중 1926년 10월 24일에 사망하였다. 강택진의 장례식은 사회운동단체연합장으로 치러졌다.

[묘소]

강택진의 묘소는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27년 10월 강택진 서거 1주기 추도회가 열렸으나, 1928년 10월 서거 2주기 추도식은 일경의 금지로 열리지 못했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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