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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57
한자 金燦奎
영어공식명칭 Kim Chan-gyu
이칭/별칭 사협(士夾),석연(石然),혁규(赫奎),보량(普亮)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6년연표보기 - 김찬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1년 - 김찬규 통신사 전화과 주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2년 - 김찬규 중추원의관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3년 - 김찬규 평안남도 지계위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3년 - 김찬규 비서승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김찬규 을사늑약으로 사퇴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김찬규 조선민족대동단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김찬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김찬규 군자금 모집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29년연표보기 - 김찬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김찬규 대통령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김찬규 건국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찬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김찬규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찬규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찬규(金燦奎)[1866~1929]는 1919년 조선민족대동단, 1920년부터는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통해 중국과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김찬규의 본관은 예안(禮安)[선성(宣城)], 자는 사협(士夾), 호는 석연(石然)이다. 별명으로 혁규(赫奎) 혹은 보량(普亮)을 썼다. 1866년 6월 13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에서 김륵(金玏)[1540~1616]의 10대손인 김휘돈(金輝暾)의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찬규는 1895년 을미의병 이후 상경하였으며, 1898년 12월 박일수(朴一洙) 등과 함께 독립협회 해산을 청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1901년 통신사 전화과 주사로 입사했고, 1902년 4월에는 중추원의관, 1903년 3월에는 평안남도 지계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03년 7월에는 정3품 비서승에 올랐다.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지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김찬규는 1919년 3월 말 전협(全協)[1878~1927]·최익환(崔益煥)[1889~1959] 등이 결성한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하였다. 김찬규는 비서승을 지낸 경력을 바탕으로 전협과 함께 박영효(朴泳孝)[1861~1939]·김가진(金嘉鎭)[1846~1922]·민영달(閔泳達)[1859~?] 등의 진신·유림단을 포섭하는 일을 맡았다. 1919년 11월 의친왕(義親王)의 상하이[上海] 망명이 실패하고, 조선민족대동단의 인사들이 차례대로 체포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김찬규는 1919년 12월 봉천 서탑(西塔)에서 경북여관을 경영하며 만주지방 독립운동을 후원하던 중, 서로군정서의 김응섭(金應燮)[1877~?]·권준희(權俊熙) 등을 만나 군자금 모집을 요청받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1920년 9월 평소 친분이 있던 신태식(申泰植)[1864~1932]·이응수(李應洙)[1897~1922] 등과 함께 경북 김천을 중심으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결성하였다. 신태식은 경북단장, 이응수는 경북총무, 김찬규는 경남단장(慶南團長)을 맡아 단원의 모집과 함께 군자금의 모집에 착수하였다. 이에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들은 경상북도 각 지역의 부호들로부터 1922년 12월까지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김찬규는 1922년 3월 만주로 들어가 서로군정서의 총재 이상룡(李相龍)[1858~1932], 법무사장 김응섭(金應燮)[1877~?] 등을 만나 조선 내 독립운동 상황을 논의하였다. 1922년 5월 초순 김찬규는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 명의로 된 군자금모집위임장 2통, 암호문 1통, 안동군 풍북면 오미동에 거주하는 김경구(金敬九)에게 전달할 문서, 군자금 1만 원을 요청하는 편지 등을 받았다. 이에 1922년 5월 하순경 봉천을 출발하여 6월 14일 김천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922년 6월 18일 김천에서 권준희로부터 권총 1정, 실탄 14발, 탄창 2개와 폭탄용 발화금 1개를 받아 예천으로 가던 중, 6월 19일 문경군 산양면 불암리에서 문경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의 가혹한 신문에도 불구하고 김찬규는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에 관한 사실은 물론이고. 서로군정서에 대해서도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김찬규는 1922년 7월 2일 소위 ‘제령 및 폭발물취체규칙 위반’으로 기소되어, 9월 28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상고하였다. 1922년 11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복역하고 있었는데, 11월 28일부터 12월 28일까지 각처를 순회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던 이대기(李大基)[1888~1940]·김사묵(金思默)[1856~?]·장탁원(張鐸遠)[1883~?]·곽방(郭玤) 등의 다른 단원들이 체포되면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이응수 등은 기소되어 1923년 9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김찬규는 이미 복역 중이었으므로 면소되었다.

김찬규는 출옥한 이후에도 군자금 모집 활동을 지속하였다. 1924년 음력 7월 20일경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1875~1926] 명의로 군정서 총국장에 임명한다는 취지의 사령서를 가지고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의 신석원(申錫遠)[1881~1959] 집을 방문하였다. 이 사령서는 1924년 음력 3월경 임시정부 파견원 김보현(金普鉉)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 김찬규는 신석원과 함께 다수의 사령서를 만들어 배부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나아가 동지들을 규합하기로 약속했다. 1924년 7월 하순경 신석원과 함께 사령서 70매를 인쇄하여 신기균(申機均)[1864~?]·구기언(具奇彦)[1884~1958]·선철구(宣澈具) 등 5명에게 나누어 주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5년 2월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26년 3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26년 5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이른바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찬규는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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