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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62
한자 南永鎭
영어공식명칭 Nam Yeong-ji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남영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남영진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남영진 징역 1년 선고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남영진 병보석 출옥
몰년 시기/일시 1920년연표보기 - 남영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남영진 대통령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 남영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남영진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보계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남영진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 지도보기
활동지 남영진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성내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남영진(南永鎭)[1894~1920]은 같은 마을의 최성원(崔盛源)[1894~1926]·안용호(安容鎬)[1884~1942]와 함께 1919년 4월 9일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가계]

남영진의 본관은 영양(英陽), 본적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보계리이나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살았다.

[활동 사항]

남영진은 1919년 3월 이후 전국 각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무렵인 1919년 4월 3일 마을 친구 최성원의 집에서 같은 마을의 안용호를 만났다. 여기서 안용호가 영주군 봉현면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안하자 남영진최성원과 함께 찬동하였다. 그리고 오는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성내동 풍기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그 자리에서 안용호가 종이로 태극기를 1장 만들어 보이자 남영진최성원과 함께 태극기를 몇 장 본떠 만들어 보관하였다.

남영진은 1919년 4월 9일 장날이 되자 안용호·최성원과 함께 아침 일찍 태극기를 준비해서 풍기장터로 나갔다. 남영진은 오후 3시 30분경 쌀시장을 중심으로 군중이 모이기 시작하자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이 호응하여 1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남영진안용호 등과 같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렬을 이루어 행진하려 하자 갑자기 풍기주재소 일본군 헌병과 수비병들이 달려와 시위 군중을 저지하며 해산시켰다. 이때 남영진안용호·최성원과 함께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던 중, 1920년 3월 20일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3일 만에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남영진은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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