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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97
한자 安容鎬
영어공식명칭 An Yong-h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연표보기 - 안용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안용호 풍기면 만세시위운동 주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안용호 징역 1년 6월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42년연표보기 - 안용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6년연표보기 - 안용호 대통령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안용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안용호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안용호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 지도보기
활동지 안용호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성내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안용호(安容鎬)[1884~1942]는 1919년 4월 3일 일어난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가계]

안용호는 1884년 12월 17일 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에서 출생하였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활동 사항]

안용호는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와 경제적 침탈에 불만이 컸다. 그러던 중 전국 각지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19년 4월 3일 오후 2시경 같은 마을의 최성원(崔盛源)[1894~1926]의 집에 갔는데, 마침 옆집에 사는 남영진(南永鎭)[1894~1920]이 와 있었다. 안용호최성원·남영진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장소는 영주군 풍기면 성내동의 풍기장터로 정하고, 오는 1919년 4월 9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성내리의 풍기장터는 당시 봉현·상리·순흥·안정·단산·부석 등지 사람들이 모이는 큰 장터였다.

안용호는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종이로 직접 만들어 보이자, 최성원남영진도 따라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9일 풍기장터에 미리 나가 동정을 살핀 뒤 쌀시장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오후 3시 무렵 장꾼들이 많이 모이는 쌀시장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100여 명에 이르는 군중이 호응하며 모여들었다. 안용호는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렬을 이루려 할 때, 순찰 중이던 풍기주재소 일본 헌병과 수비병들이 달려들었다. 결국 시위대는 해산되고 안용호최성원·남영진과 함께 체포되었다. 안용호는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안용호는 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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