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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인적이 서린 죽령 옛길에서 찾는 힐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1308
한자 千年-人跡-竹嶺-
영어공식명칭 Healing on the Odl Jungyeong Road with Human Traces through a Thousand Years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현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7년 12월 17일 - 죽령 옛길 명승 제30호 지정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의 소백산 제2연화봉도솔봉이 이어지는 지점의 해발고도 696m의 고갯길.

[개설]

죽령 옛길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과거 영주와 단양을 연결하던 옛길이었으며 소백산국립공원 내에 있다. 죽령 옛길은 ‘대재’라고도 부르며 삼국시대 이래로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또 소백산맥이 영남과 호서를 갈라놓는 길목에 해당한다. 죽령 옛길은 비경으로 이름난 계곡과 녹음 우거진 소백산 능선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따라 2007년 12월 17일 명승 제30호로 지정되었으며, 영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죽령 옛길, 에코 힐링로드와 슬로로드]

힐링로드란 힐링[healing, 치유]과 로드[road, 길]의 합성어로서 길을 걸으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조성된 길을 의미한다. 힐링로드가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조성되었을 경우 자연 속에서 치유력을 회복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을 누리는 에코 힐링(eco-healing)의 기능도 겸하게 된다.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은 1999년 10월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i)의 파올로 사투르니니(Paolo Saturnini) 전 시장을 비롯한 몇몇 시장들이 모여, 위협받는 달콤한 인생의 미래를 염려하여 ‘치따슬로(cittaslow)’, 즉 슬로시티 운동을 출범시키면서 시작되었다. 결국, 슬로시티 운동은 슬로푸드 먹기와 느리게 살기(slow movement)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술혁명으로 인간은 빠름이 주는 편리함을 손에 넣기 위해 값비싼 느림의 즐거움과 행복을 잊고 말았다. 따라서 여기서 지향하는 슬로시티의 철학은 성장에서 성숙으로, 삶의 양에서 삶의 질로, 속도에서 깊이로 변화함을 존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슬로시티 운동은 대다수 사람이 섬기는 ‘속도 숭배’를 ‘느림 숭배’로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빠름은 짜릿하고 생산적이고 강력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빠름이 없었다면 아마도 한국은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빠름과 느림, 농촌과 도시, 로컬과 글로벌,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 조화로운 삶을 지키는 것이다. 이에 따라 2018년 기준으로, 한국에는 15개 슬로시티가 지정되어 있다.

죽령 옛길은 흙을 밟으면서 발바닥에 느껴지는 시원한 촉감과 숲속에서 나오는 산소, 피톤치드를 들이마시면서 느낄 수 있는 상쾌한 기분을 선사한다. 우리의 몸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데 이것이 바로 ‘자연을 통한 치유’, 즉 에코 힐링이다. 느림의 미학을 즐기면서 죽령 옛길을 걸어본다면 자연스럽게 에코 힐링이 될 수 있으며 느림으로 얻는 풍요로움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죽령 옛길의 역사]

『삼국사기』에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 3월에 비로소 죽령 길이 열리다.”라고 했다. 여기서 아달라왕 5년은 서기 158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죽령 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다.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竹竹祠]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라는 산신 사당이 있었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 있는 죽령은 삼국시대에 한동안 고구려의 국경으로 신라와 대치하였다. 그리고 삼국의 군사가 뒤엉켜 치고 쫓기고, 엎치락뒤치락 불꽃 튀는 격전장이기도 했다. 이후 1910년대까지도 경상도 동북지방 여러 고을이 서울을 왕래할 때 모두 죽령 옛길을 이용했다. 청운의 뜻을 품은 과거 선비, 공무 수행 중인 관원들, 온갖 물산을 유통하는 장사꾼들까지 사시사철, 이 죽령 옛 고갯길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방(馬房)[마구간을 갖춘 주막집]들이 목목이 늘어 있었다. 이처럼 죽령 옛길은 장장 2천 년의 유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나라 동남지역 교통의 대동맥이었던 길이었다.

그러나 교통수단의 발달로 이곳 죽령 옛길을 이용하는 사람이 끊기면서 수십 년 동안 숲과 덩굴에 묻혀 있었다. 그리고 약 20년 전인 1999년, 죽령 옛길의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려는 뜻에서 영주시에서 희방사역부터 죽령주막까지 1시간 정도 걸리는 2.5㎞의 길을 복원하였다. 이제 누구나 울창한 숲의 나무와 산세, 다람쥐 등이 반기는 산길을 걸으며 선인들의 발자취를 느껴볼 수 있게 되었다.

[죽령 옛길 경로]

죽령 옛길희방사역-느티쟁이주막터-주점터-죽령마루까지 도보여행길로 길이는 약 2.8㎞이며 왕복 110분가량 소요된다. 옛길을 따라 ‘죽령의 산신, 다자구 할머니’ 등 죽령 옛길과 관련된 안내 표지판이 있어 인문학적 지식도 쌓을 수 있다. 한편 희방사역 갈림길에서 희방사, 희방폭포 방향으로는 연화봉[1,394m]까지 이어지는 길이 조성되어 있다.

죽령 옛길소백산자락길 중 제3자락의 일부이기도 하다. 제3자락길의 경로는 희방사역-죽령 옛길-죽령마루-용부원리-대강면[장림리]으로 이어지는 11.4㎞ 길로 대체로 3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 소백산자락길 중 제3자락은 옛 서민들의 애환 서린 전설이 흐르고 있는데, 예로부터 죽령을 ‘아흔아홉 굽이에 내리막 30리 오르막 30리’라고 했다. 한양과 경상도를 잇는 최단 경로인 탓에 사람들은 힘들어도 이 험한 고개를 넘었다. 그래서 이곳은 1910년대까지만 해도 사시사철 번잡했다고 한다.

죽령 옛길의 시작점인 희방사역중앙선에 있는 기차역으로 죽령역과 풍기역 사이에 있다. 1942년 4월 1일 배치간이역[역무원이 있는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했으며 1951년 보통역으로 승격하였다. 무궁화호가 운행되며 여객, 승차권 발매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현재 코레일(KORAIL) 경북북부지사 소속이며, 하루 2회의 무궁화호가 정차한다. 부근에는 희방사와 소백산 천문대가 있다.

1936년에 건설된 죽령터널은 길이 4,500m로 태백선의 정암터널이 완공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철도 터널 중 가장 긴 터널이었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군용 목적으로 건설된 중앙선에 위치한 죽령터널은 서울 청량리역을 기점으로 하여 194.87㎞ 지점에 있다. 단면 형태는 말굽형[馬蹄型]이며, 단면 제원은 너비 3.9m, 높이 5.9m로서 단선으로 되어 있다. 죽령터널은 1949년 8월 18일 터널에서 열차가 갑자기 탈선하여 승객 380명 중 48명이 사망하고 101명이 부상을 당하면서 당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죽령주막은 과거 죽령 옛길을 오가는 사람이 많으니 사시사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는 마방(馬房)과 주막이 들어서 있을 정도로 큰길이었으나 1940년대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고갯길을 넘나드는 발길은 점점 줄어들었다. 1960년대 포장도로가 신설되고 2001년 당시 국내 최장 터널인 죽령터널이 생기면서 죽령 고갯길은 조금씩 지워져 숲으로 돌아갔다.

과거 고개 시작 지점의 주막거리와 함께 고개 정상의 주막거리가 가장 컸는데, 지금은 여기저기 무너진 담장이 남아 있고 구들장의 흔적만 보인다. 그렇게 사람들의 뇌리에서 까맣게 잊힌 곳이, 1999년 영주시에서 길을 복원하면서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령 정상부의 죽령주막터에는 같은 명칭의 전통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죽령 옛길에 얽힌 이야기]

죽령 옛길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얽혀 있다. 먼저 「죽령 산신당 신화」[「다자구 할머니」 신화]를 살펴보면, 과거 죽령 일대에는 도적 떼 소굴이 곳곳에 있어 행인을 상대로 도적질을 하였다고 한다. 심지어는 공납물조차 노략질하여 당시 고을원이 곤경에 처했는데 그때 한 할머니가 나타나서 도둑을 잡을 수 있는 묘안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인근 군에 가서 군사들을 지원받아 도적 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고을원에게 청하였다. 고을원은 할머니의 말을 듣고 가까운 풍기, 영춘, 청풍의 수령에게 군사를 지원받아 매복시켰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가 “다자구야!”라고 외치면 도적 떼가 잠을 자고 있는 신호요, “들자구야!”라고 외치면 도적 떼가 자지 않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신호라고 알려주었다. 이후 할머니는 도적 소굴 근처에서 “다자구야, 들자구야!”라며 외치고 다녔다. 도적 떼가 웬 소리냐고 묻자 할머니가 말하기를, “나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큰아들은 다자구요, 작은아들은 들자구인데, 두 아들이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아 찾아다닌다.”라고 하였다. 도적들이 의심하지 않고 도적 소굴에 같이 머물게 하였다.

어느 날 두목의 생일을 맞아 도적들은 밤이 깊도록 술을 마시고 취해서 잠이 들었다. 할머니는 “다자구야!”라고 외쳤고,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한순간에 도적 떼를 잡았다. 한편 궁중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보상하고자 할머니를 찾았지만 결국 못 찾았다고 한다. 어느 날 임금의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 연을 띄워 그 연이 떨어진 곳이 내가 자리 잡을 곳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곳이 지금의 죽령산신당 자리이다. 그 후 다자구 할머니는 신으로서의 영험함을 보였고, 점차 마을 사람들은 죽령 산신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죽령과 얽힌 두 번째 이야기는 「오대산 상원사 동종 이야기」[「죽령재와 상원사 동종」]이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상원사에는 국보 제36호인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이 있다. 종의 높이는 167㎝, 입지름은 91㎝이다. 용뉴 좌우에 오목새김 된 명문에 의해 이 종이 725년(성덕왕 24)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동의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 문루에 걸려 있던 것을 1469년(예종 1) 국명(國命)에 의하여 현 위치로 옮겨 보관해 오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안동에서 상원사로 옮기기 위하여 말 500여 필을 동원하여 죽령을 통과해 가던 중, 고갯마루 바로 아래쪽에서 종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종두를 하나 떼어 원래 있던 자리에 묻어주니 비로소 움직여 무사히 상원사까지 갈 수 있었다. 실제로 상원사 종에는 종두가 하나 없다.

세 번째 이야기는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장군과 죽령 이야기」이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 있는 죽령은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신라의 격전지였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이 재위하던 470년(장수왕 58)경이었다. 이후 551년(진흥왕 12) 신라의 진흥왕이 죽령 이북의 10개 고을을 탈취하자 40년 뒤인 590년(진평왕 12) 고구려 명장 온달 장군이 영양왕에게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했음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당시 죽령이 얼마나 막중한 요충지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죽령 옛길 자연관찰로]

죽령 옛길을 품은 숲은 오랫동안 인적이 끊긴 덕분에 식생이 다양하다. 산나무, 물푸레나무, 서어나무 등 온갖 수목과 개별꽃, 피나물, 애기똥풀 등 형형색색의 야생화가 죽령 옛길을 찾은 등산객들을 반긴다.

희방사역에서부터 죽령휴게소까지의 자연관찰로 순서는 ① 명인의 자취, ② 느티정 주막거리 터, 주점 주막거리 터, ③ 죽령 옛길 야생화, ④ 으름덩굴, ⑤ 뱀은 왜 혀를 날름거릴까?, ⑥ 달팽이, ⑦ 버섯은 식물과 어떻게 다를까?, ⑧ 도솔봉의 동삼, ⑨ 잔운대와 촉영대, ⑩ 봄에 깨어나는 눈, ⑪ 산토끼, ⑫ 신라의 명신 죽지, ⑬ 흑백의 귀여운 새-박새, ⑭ 소나무와 잣나무, ⑮ 신종이 보인 이변, ⑯ 쇠뜨기와 이끼, ⑰ 귀화식물-서양민들레와 개망초 순으로 자연학습장이 이루어져 있다.

자연학습장의 명칭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죽령 옛길 자연관찰로에서는 이끼류에서 상록교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물상, 박새 등 조류, 달팽이와 토끼 같은 고도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식생을 관찰할 수 있는 종합적인 자연학습장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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