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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1313
한자 民族獨立-爲-獻身大韓光復團
영어공식명칭 Devotion for Independence, Korea Liberation Corps
이칭/별칭 풍기광복단,광복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단의 활약상.

[개설]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가 결성되었다. 대한광복회는 영주의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된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이다. 대한광복회는 국외 독립운동 단체 지원 및 독립군 양성에 목적을 두고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에 전력하였으며, 이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친일 부호 처단과 의열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대한광복회의 활동은 1900년대 애국계몽운동 및 의병항쟁의 연장선상, 1910년대 후반 국외 독립운동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대한광복회 결성의 중추적 역할을 한 영주시의 대한광복단이다. 처음에는 한 지역에서 결성된 작은 독립운동 단체였지만, 이후 1910년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현재 영주시에서는 이러한 대한광복단의 활약을 기리기 위하여, 대한광복단기념공원 조성 등 지역의 역사적 자긍심을 정립하기 위한 사업을 지속해서 추진해 나가고 있다. 이에 여기에서는 대한광복단의 결성 과정과 활약상을 통해, 영주 지역 선열들의 우국충정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우국지사들이 풍기로 모여들다]

광복단은 일제강점기이던 1913년 경상북도 풍기군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이다. 옛 풍기 지역은 『정감록(鄭鑑錄)』에서 십승지의 제일이라 일컫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금계바위가 있는 풍기의 금계촌(金鷄村)은 십승지 중에서도 제일 첫 번째로 꼽는 곳이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살기(殺氣)가 없어서 사람 살기에 가장 좋다.”라고 칭송한 소백산의 줄기에 있다.

그런 가운데 19세기 후반 무렵, 전국 팔도에서 이주민들이 십승지 중에서 으뜸으로 꼽는 풍기의 금계촌으로 몰려들었다. 이 분위기 속에서, 나중에 광복단을 결성하게 되는 인사들도 풍기 일대로 모여들어 국권 회복을 위해 뜻을 모았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광복단을 결성한 인사들이 소위 ‘정감록파’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8도에서 모여드는 이주민이 많은 곳이어서, 풍기 지역이 과거 동학교도였거나 개항기 의병이었던 우국지사들에게는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기 좋은 곳이 되었다.

[대한광복단이 결성되다]

1910년 경술국치와 함께 나라가 망한 뒤, 의병 항쟁이나 계몽운동을 전개했던 민족 지사들은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1910년 이후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참여하려는 민족 지사들의 만주 이주는 계속 이어졌고, 한편으로는 만주를 비롯하여 연해주 등 국외로 망명했던 우국지사들이 국내로 잠입하여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인적·물적 지원을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그 일환으로 국내에서 비밀 결사적인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인 단체로는 독립의군부·대한광복단·민단조합·대한광복회·조선국권회복단 등이 있다.

대한광복단은 1913년 정월 채기중(蔡基中)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이다. 대한광복단채기중이 주도하여 당시 풍기에 우거하고 있던 전원식(全元式)·정성산(鄭星山) 등 10여 명과 함께 결성하였는데, 그 결성의 전후 사정에 대하여 양제안(梁濟安)의 『양벽도공제안실기(梁碧濤公濟安實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봉초·정성산 양공(兩公)이 내방하여 시국이 날로 잘못되어 감을 논하며, ‘요사이 풍기에 의기가 충천하는 선비 소몽(素夢) 채기중이 있어 생산 작업에 구애받지 않고 3가(三家)의 재산을 모두 합하여 풍기에 혁명 기관을 비밀히 설치하고 엄밀히 전국 의려(義旅)의 잔당 장교와 모험 용사를 모집하여 바야흐로 대사를 도모할 계획입니다. 공께서 마땅히 가서 논의하고 지휘함이 어떻겠습니까.’ 공은 흔연히 풍기로 따라가서 채공과 더불어 하룻저녁 뜻을 나누고 마침내 사생을 함께 하는 약속으로 혼인을 허락하여 초례일을 정하고 돌아온즉 공의 계자(季子)이며 일자는 계축(癸丑) 2월 15일이다. 이해 정월 다시 출발하여 만주를 다녀와서 성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만주에서 일이 끝나지 않고 또 감기가 들어서 부득이 체류하게 되니 본가로 서신을 보내 그대로 혼행을 치르도록 명하였다. 고로 밤을 도와 이행하였다. 그러나 정한 날은 이미 지나 [음력] 2월 30일에야 겨우 머슴 한 사람에 두 필의 폐백을 지도록 하고 배행(配行)과 신랑이 모두 걸어서 풍기로 갔다. 풍기읍에 이르러 초두의 주점에서 소몽이 사는 마을을 물은 즉 과연 멀지 않았는데, 경주에서 초행(醮行)이 왔다고 하니 동지 10여 인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이처럼 대한광복단채기중이 주도하여 전국의 의병장 인사를 단원으로 조직한 혁명 기관이었다. 혁명 기관이라 함은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독립운동 단체이다. 이것은 1911년 전개된 중국의 신해혁명과 같이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독립의 달성이라 할 수 있다.

채기중은 1873년(고종 10) 경상도 함창군 이안면 소암리[지금의 상주시 이안면 소암리]에서 출생하여, 1902년 풍기로 이주한 인물이다. 그리고 전원식·정성산 등과 더불어 처음 광복단의 조직을 계획하였다. 이들 3인은 가산을 합하여 광복단의 자금으로 삼고, 전국의 의병장과 용력을 갖춘 인사들을 규합하였다. 양제안의 계자(季子)인 한성(漢星)의 초례 행렬을 맞이한 ‘동지 10여 인’이 바로 이들이었다. 이들은 의병에 참여하였던 경력의 소지자들로 풍기면 동부동과 서부동 일대에 우거하였거나, 주변 지역에서 모인 인물들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양제안의 호는 벽도(碧濤)이며,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1851년(철종 2)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의지리에서 양제구(梁濟九)의 장자로 태어났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에 16세의 소년으로 척사 격문을 돌린 바 있고, 1884년(고종 21) 진천기군(鎭川起軍)을 통해 일본군의 구축을 도모한 바 있다. 그 후 을미의병 때에 양제안은 김산의진(金山義陣)[경북 서북부 지역 유생들이 지금의 김천시에서 결성한 항일의병진]에 참여하였고, 을미의병 해산 뒤에는 영일군 죽장면 두마리에 은거하여 신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등 계몽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 1905년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재기하자 양제안은 홍주에서 창의한 민종식 의병진(閔宗植義兵陣)에 참여하였다가, 1907년 이후에는 영천의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백산(白山) 우재룡(禹在龍) 등과 탁월한 유격 전술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전국적으로 퍼진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양제안의 구국을 위한 투쟁은 매우 다양하였다.

채기중광복단을 결성하고 전국적으로 단원을 결속하는 과정에서 양제안을 영입하였고, 양제안의 아들 양한성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켜 연비 관계를 맺었다. 양제안이 대한광복단의 결성에 참여하게 된 것은 함께 의병 활동을 전개했던 동지들을 규합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단원을 모집하고 만주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대한광복단의 단원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인물들은 채기중[상주]·유창순(庾昌淳)[천안]·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청양]·강순필(姜順必)[혹 강병수(姜秉秀), 풍기]·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오(金相五)·정운홍(鄭雲洪)[괴산]·정진화(鄭鎭華)[예천]·장두환(張斗煥)[천안]·황상규(黃尙奎)[밀양]·이각(李覺) 등이 있다. 풍기광복단 결성 초기의 단원들은 대부분 의병적인 인물이거나, 십승지지로 알려진 풍기에 우거한 인사들이다. 특히 의병 출신의 강순필·정진화 등 경북 북부 지역 출신자들은 이강년 의진의 의병이었고, 유창순·한훈 등은 민종식의 홍주의진 출신의 의병이었다.

채기중이 상주에서 풍기로 들어가 우거하면서 광복단을 결성할 때, 이들의 영입이 먼저 이루어졌기에 추후 충청도와 경북 북부 지역의 다른 의병 출신자들과 밀접하게 기맥을 통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강순필은 1914년 9월 결성된 민단조합에 가담하여 경북 북부 지역의 이강년 의진 출신 조용필(趙鏞弼)[예천]·정진화(鄭鎭華)[예천]·윤창하(尹昌夏)[예천] 등을 대한광복단에 영입하는 데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더욱이 민단조합의 이은영(李殷榮)[문경]·김낙문(金洛文)[예천]·이세영(李世永)[아산] 등은 1913년 임병찬(林炳瓚)이 조직한 대한독립의군부에 참여하고 있던 의병 출신으로 이들을 통해 충청도 등지의 다른 의병 출신자들과도 기맥을 통할 수 있는 위치였다.

1910년 이후 국내에서 항전 기반을 상실한 의병 출신 인사들이 새로운 대일항전의 기지로서 만주를 설정하고, 만주로 떠나는 과정에서 상호 교통이 이루어졌음은 말할 것도 없고, 만주에서 국내를 왕래하며 국내의 근거지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광복단이 결성되었다. 대한광복단은 만주의 독립운동기지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므로 대한광복단은 결성 과정에서 서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던 망명 지사들과 직접 연락을 취하며 왕래하고 있었다.

[대한광복회로 발전하다]

한말의 의병 및 그와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 조직한 대한광복단은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지원하기 위해 연락을 취하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광산이나 친일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국내에 기반을 둔 독립운동 단체가 비밀 결사 활동을 통해 국외의 독립운동기지를 지원함으로써, 항일 독립운동의 국민적 기반을 마련한다는 투쟁 방략에 따른 것이었다.

양제안의 『양벽도공제안실기』를 보면, 양제안은 대한광복단에 참가한 뒤 1913년 정월 만주에 들어가 활동하였고, 만주에서 만난 조선국권회복단의 박상진(朴尙鎭)과 이복우(李福雨)를 풍기의 채기중에게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공은 만주에 이름이 널리 전파되어 있었는데, 하루는 젊은 소년이 찾아와서 울면서 ‘국사를 복권할 계책이 장차 어찌하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선생의 고명함으로써 장차 선도하심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고하였다. 공은 ‘풍기에 채기중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진실로 의사이며 또한 영웅이다. 바야흐로 현사를 불러 모으고 있으니 그대는 마땅히 가서 참여하라.’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복우·박상진이 만주에서 풍기에 와서 공의 차자 한위(漢緯)를 방문하여 채기중을 만나 함께 큰일을 하기로 하고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소몽공(小夢公)은 세상일이 뜻과 같지 않음에 조급하고 답답하여 비밀히 모험용사대 80여 명을 조직하고 만주로부터 권총과 탄환을 구입, 전국적으로 부호들의 금고를 강탈하여 군자금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를 미루어 볼 때, 결성 초기부터 대한광복단은 만주의 독립운동기지와 관계를 맺고 군자금 모집과 청장년의 국외 이주를 추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광복단채기중은 80여 명의 모험용사대를 조직하여 만주로부터 권총과 탄환을 구입하여 전국에 출몰하면서 부호의 금고를 강탈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채기중은 강병수와 함께 군자금 탈취를 계획하고 강원도 영월군 상동의 일본인이 경영하는 중석광에 광부로 잠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친일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수합의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대한광복단은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와 합류하여 1915년 7월 15일 대한광복회로 발전하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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