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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1318
한자 -榮州
영어공식명칭 Home of the Classical Scholar, Yeongju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자운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계승해나가는 선비정신.

[개설]

영주시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安珦)과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鄭道傳)의 고향이자, 관학의 부진으로 조선의 교육이 위태롭던 시기 주세붕(周世鵬)이 최초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하여 조선의 수많은 인재와 지도자를 배출한 선비 교육의 요람으로 일컬어져 왔다.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국난의 상황마다 목숨을 바쳐 의(義)를 실천한 충절인과 순국자를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배출한 곳으로 예부터 ‘선비의 고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선비란 무엇인가?]

우리말 ‘선비’의 어원은 통상적으로 한자어 ‘선배(先輩)’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 선비라는 단어가 한글로 처음 표기된 것은 이미 최초의 한글 기록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서 비롯된다. 『용비어천가』에서는 ‘션ᄇᆞㅣ’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한자의 ‘유(儒)’에 대한 한글 표기어이다. 이미 이 시기부터 ‘유[유학]’와 선비는 동일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션ᄇᆞㅣ’는 ‘유’와 함께 ‘사(士)’를 지칭하는 낱말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다만 조선 초기까지는 ‘사(士)’를 ‘선비 사’라고 부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사(士)’를 됴사[朝士]라 했고 그 뜻을 ‘학문을 해 지위에 오른 사람’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다가 비로소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야 ‘선비 사’의 용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588년(선조 21)에 간행된 『석봉천자문(石峰千字文)』에서 ‘사’를 ‘선비 사’로 부르면서 이후 안정된 개념으로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중국에서 ‘사(士)’는 은대(殷代)에는 관직 이름으로, 주대(周代)에는 봉건 계급에 속한 신분 계급으로 드러났다. 즉, 천자·제후·대부·사·서인의 5등 봉건 신분 계급에서 ‘사’는 ‘대부’보다 낮고 ‘서인’보다 높은 신분이며, 관류의 직분으로서는 가장 하위에 속하는 계급이었다. 그러나 ‘사’의 성격은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와 맹자를 중심으로 유교 사상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관직과 분리되어 인격적 측면이 뚜렷하게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자신을 ‘사’의 집단으로 자각하였다. 그들은 관직 그 자체를 학문의 목적이 아니라 ‘도(道)’를 실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따라서 ‘지위’가 아닌 유교 이념을 실현하는 ‘인격’을 ‘사’의 의미로 확립하였다. 공자는 도에 뜻을 두어 거친 옷이나 음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격을 선비의 모습으로 강조하였다. 이처럼 중국에서도 공자 이래로 ‘사’는 신분이나 계급의 의미를 넘어 유교적 인격체로 파악되고 있으며, 우리말의 선비가 지닌 유학적 이상의 실천 주체로서의 인격적 의미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 집단의 탄생과 그 문화적 의미]

‘선비’ 집단이 조선 사회에서 차지했던 문화적 의미는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조선의 선비들은 역사적 경험을 축적하면서 동시에 역사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면서 특유의 문화지형을 만들어냈다. 우선 그들은 조선 건국 과정과 일련의 사화(士禍)를 통하여 정론(正論)은 반드시 피력하는 절의의 전통을 만들어냈다. 그 첫 물꼬를 튼 인물로 선산을 무대로 하여 영남 사림파를 태동시킨 길재(吉再)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길재의 고려에 대한 절의 정신은 이후 영남 사림파들의 정신적인 지향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길재의 절의 정신은 사승관계를 통하여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 등으로 이어지는 도통론을 형성하였다. 도통론은 조선조의 선비정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금석의 역할을 한다.

선비들은 도통론을 통해 누가 과연 올바른 성인의 삶을 따랐고, 누구의 학문이 정학인가를 이해하였다. 그런 점에서 길재가 권력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지 않고 지조를 지킨 선비상을 남겼다는 것은 도통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길재의 이러한 절의 정신은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서경』의 ‘지치형향 감우신명(至治馨香感于神明)’에서 따온 말로서,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정치사상] 정치 성향과 맞물리면서 더욱 확고한 선비정신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15세기 말부터 성장한 사림 세력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훈구 세력에 맞서는 도덕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자임하면서 전제적 왕권에 맞서고자 하였다. 사림세력들은 이러한 과도한 도덕 의지로 인해 사화(士禍)라는 역풍을 맞았으나 의(義)를 숭상하는 선비문화를 이 땅에 뿌리내리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선비의 고장 영주]

영주시는 ‘선비의 고장’이라 불린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해 성리학의 비조가 된 안향과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의 고향이자, 주세붕이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워 국가의 인재 양성에 힘썼던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단종복위운동에 앞장선 충절의 고장이자 항일의병, 독립운동 등으로 국난의 시기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의리와 지조를 지킨 지역인 까닭이다. 안향은 학자로서 성리학을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장학재단인 양현고를 설립해 인재를 양성하고 후학을 길러냈다. 안향으로부터 시작된 학맥은 백이정, 권부, 이색,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등에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주 소수서원은 조선시대인 1543년(중종 38) 주세붕에 의해 창건됐다. 주세붕의 뒤를 이어 퇴계 이황은 조정에 건의하여 국가에서 최초로 사액을 받음으로써 국가의 공인과 지원을 받아 지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공적·제도적 기반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황소수서원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이들은 후일 도산서원을 건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정치가 정도전 또한 영주 사람이다. 정도전은 나라의 근본이 백성임을 강조한 민본사상가이자 조선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정치가로 잘 알려졌지만, 정도전 역시 성리학자로서 후학을 가르쳤던 선비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의 장남으로 태어난 삼봉 정도전은 일찍이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1362년(공민왕 11) 진사시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라 후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가 된다. 그러나 1375년(우왕 1) 친원파 권문세족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다 회진현[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지에서 정도전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을 몸소 깨우치고 조선을 개국하며 태조 이성계(李成桂)에게 “백성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며,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백성이 군주를 버릴 것이다.”라고 간하였다. 선비와 백성의 나라를 꿈꾸며 불교를 배척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이방원과의 대립으로 1차 왕자의 난 때 희생되었다.

또한 영주[순흥]는 세종의 장모였던 순흥안씨의 고향이었다. 세종의 아들 금성대군단종을 보호하다 결국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유배를 당했고,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면서 결국 할머니의 고향 순흥으로 위리안치되었다. 그러나 유배 후에도 절의는 꺾이지 않고 오히려 순흥도호부사 이보흠과 순흥의 선비들을 중심으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거사를 준비하던 중 고변으로 발각돼 금성대군이보흠 및 복위에 관계한 수많은 순흥 선비들이 살육을 당한 정축지변(丁丑之變)의 대 참화를 겪게 된다. 그들이 흘린 피가 죽계천을 따라 40리 아래쪽인 동촌리까지 흘러내려 그 마을을 피끝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학문으로 영주를 빛내다.]

영주 지역에 학문으로 이름난 선비로는 박승임(朴承任), 황준량(黃俊良), 황효공(黃孝恭) 등이 있다. 박승임퇴계 이황의 문인이자 조정과 향촌에서 모두 학행으로 이름난 조선 중기 영주 지역의 대표적인 명현이다.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등을 거쳐 도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논어』와 주자서(朱子書)를 탐독하였으며,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기록해두었다가 스승인 이황에게 질문하여 실력을 크게 인정받았다. 시문에 능하여 한때 많은 시를 지었지만, 중년 이후로는 사람을 천박하고 경솔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이를 중지하고, 심학에 주력하여 실천적 수행에 힘쓰면서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저서로는 『성리유선(性理類選)』·『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강목심법(綱目心法)』·『소고집(嘯皐集)』 등이 있다.

황준량이황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154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신녕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신녕현감 재임 시 굶주린 백성들을 잘 구휼하면서 문묘를 수축하고 백학서원을 창설하였다.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는 경내의 피폐상을 상소해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하는 특은(特恩)을 받기도 하였다. 벽지에 있던 향교를 군내에 옮겨 세우고, 이 지방의 출신으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들을 문묘 서편에 따로 사우(祠宇)를 마련해 제사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성주에서도 영봉서원과 문묘의 중수, 공곡서당과 녹봉정사의 건립을 추진하는 등 교육 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황효공은 1521년(중종 16) 문과에 급제, 사간원사간으로 있을 때 생질이 권신들의 미움을 받아 함께 탄핵, 파직되자 영주로 낙향하여 구암정사를 짓고 독서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도상학과 역학에 밝아 역범도를 완성하였다.

[과학으로 삶을 이롭게 하다.]

조선의 과학기술 발전에 공헌한 선비로는 김담(金淡)이덕홍(李德弘)을 들 수 있다. 김담은 조선 세종 때의 천문학자로 영주 삼판서 고택에서 태어나 1435년(세종 17)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정자 등을 역임하였다. 이순지와 더불어 당대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로서 당시 천문·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하였고, 이순지·정인지 등과 함께 『칠정산내편』, 『칠정산외편』, 『태양통궤』, 『태음통궤』 등의 천문역서를 편찬하였다. 특히 기존에 원나라에서 들여온 역서는 중국 역법을 기준으로 제작되어 있어 조선의 현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았는데 이를 조선의 기준에 맞는 역법으로 바로잡았다.

이덕홍이황의 문인으로 역학과 산학에 정통하여 선기옥형(璇璣玉衡)과 혼천의를 제작하였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학행이 높은 선비 아홉 사람을 천거할 때 4위로 뽑혔으며, 임진왜란 때는 세자를 따라 성천까지 호종하였다. 이때 상소문에 귀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는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였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다.]

임진왜란과 한말에 의병장으로 활약한 선비로는 이개립(李介立), 배응경(裵應褧), 금달연(琴達淵), 이교영(李敎永), 김동진(金東鎭) 등이 있다. 이개립은 김성일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입격하고, 1591년(선조 24) 장현광과 함께 유일(遺逸)로 뽑혀 참봉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역 선비들과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는데 부족한 식량과 군량의 조달에 공이 컸다. 이 공으로 수령을 감당할 인재 30명 중 한 사람으로 천거되어 자여찰방과 낭천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정유재란 때는 종사관 황여일의 천거로 향병 대장이 되어 전공을 세우고 영주로 내려와 학문 수양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배응경박승임의 문인으로 1576년(선조 9)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청도군수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대항하여 싸웠다. 순찰사와 안집사에 보고하여 화약과 총통을 공급받고 무기와 군기를 갖추었다. 이에 격문을 지어 관내 선비들에게 참여를 호소하여 군사 천명을 모아 그들을 ‘야격군’이라 하였다. 적진의 형세를 살펴 허점을 찾아 공격하니 적진이 크게 동요하여 왜적 수백 명을 포획하거나 수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금달연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순흥에서 김낙임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이교영은 1873년 영주에서 태어나 1909년 말까지 소백산 일대에서 유격전으로 크게 활약한 의병장이다. 을사5조약과 정미7조약 등 일제의 각종 침략 조약에 반대하였고, 일제 침략자들을 이 땅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친일파의 응징에도 주력하여 일진회원이나 한인 밀정을 과감하게 처단하고, 군자금을 거둬들이는 일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09년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김동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한국 유림대표 137인의 한 사람으로 파리장서를 보내어 왜적의 악독한 침략성을 폭로, 조국의 광복을 국제정의에 호소하였다. 이 파리장서사건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지만, 옥중에 있으면서도 항상 관대(冠帶)를 갖추고 꿇어앉아 경서와 예학을 강론하였다. 퇴계 이황으로부터 이상정·김흥락으로 이어지는 영남의 도학을 충실히 계승하여 학문탐구와 선비정신 실천, 후진 양성에 여생을 보냈다.

[붓으로 역사를 전하다.]

임진왜란 당시 상황 및 영주 지역의 역사와 민속을 기록에 남긴 선비로는 권두문(權斗文), 이여빈(李汝馪), 김응조(金應祖) 등이 있다. 권두문박승임의 문인으로 1592년 평창군수에 부임하였을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평창 지역으로 들이닥친 왜군과 일전을 치러야만 했는데,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영월·원주 등지로 이송되었다가 탈출하기까지 20여 일 동안을 적진에 갇혀 있게 되었다. 권두문은 이에 대한 경과를 『호구록(虎口錄)』이란 기록으로 남겼는데, 여기에는 당시 관민들을 통솔했던 자신의 결연했던 입장이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여빈은 160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이이첨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뒤 벼슬을 단념하고 현 영주시 부석면 감곡에 은거하여 후진 교육에 힘썼다. 1625년 이산서원 원장의 신분으로 고을 선비 박성범·김여욱 등과 더불어 영주의 사적을 수집하여 최초의 영주 향토지인 『영주지』[취사본]를 편찬하였다. 이여빈은 『영주지』 서문에서 지방 향토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영주에 유능한 인재들이 수없이 배출되었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아 훗날 본 고을의 민속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채록할 수가 없게 된다면 어찌 한 고장의 흠결이 아니겠는가.”라고 편찬 동기를 밝혔다.

김응조는 1613년(광해군 5) 생원시, 1623년(인조 1) 알성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영주의 향토지인 『영주지』[학사본]를 편찬하여 이여빈의 『영주지』[취사본]의 내용을 보강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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