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024
한자 衣生活
영어공식명칭 Clothing Life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인균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시민들이 즐겨 입던 의복이나 의복과 관련된 생활 및 풍속.

[개설]

영주 지역은 다른 지역민들과 비슷하게 대마와 목화를 재배하여 옷감을 짜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현재는 길쌈을 하지 않으나, 과거 영주 지역에서는 삼베와 무명길쌈을 주로 하였다고 전해진다. 6.25전쟁 이후 길쌈이라는 풍속은 점차 사라지고 시장에서 파는 광목과 같은 옷감을 사서 집 또는 바느질집에 맡겨 만들어 입었다. 영주 지역에서는 풍기인견이 유명하여 속옷에서부터 겉옷까지 다양한 옷에 사용되었다. 1970년대 이후 한복이 점차 사라지고 양복과 현재 기성복을 만들어 입거나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전통의복]

영주 지역의 전통의복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대체로 길쌈을 하여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삼베길쌈의 경우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솥을 이용하여 많은 양의 삼베를 삶아 옷감을 만들었다. 삼베길쌈을 만드는 작업은 다음과 같다.

삼베를 큰 솥에 삶아 벗겨 껍데기를 만든다. 껍데기를 햇볕에 널어 색을 바란 후 손톱이나 치아를 이용해 가늘게 찢어 다시 햇볕에 말리는 일을 반복한다. 이렇게 실을 만들어 베틀을 사용해 삼베를 짜는데, 오랜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하여 두레 길쌈을 조직, 공동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무명길쌈은 목화씨를 따다가 씨앗을 제거한 후 활을 이용해 탄다. 고치를 만든 후 물레로 실을 만들어 삼베와 같이 베틀을 사용하여 무명을 짰다. 삼베는 결이 거칠어 여름철에 많이 입었으며, 무명은 부드러운 재질로 인해 솜과 함께 옷을 지어 겨울에 많이 입었다. 예부터 삼베나 무명보다 고급 옷감이었던 명주는 누에의 고치를 물에 삶아 만든 실로 짠 옷감이다. 명주는 구하기에 삼베나 명주보다 어려운 옷감이기에 명절 설빔으로 입거나 혼수품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명주는 삼베나 무명보다 염색이 잘되어 한국의 염색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옷감이다.

[의복의 근대화]

1970년대 이후 의복에도 근대화가 일어났다. 한복이라는 전통복장과 길쌈을 통해서 해 입었던 의복 풍습이 점차 사라지며, 전문 바느질집과 시장에서 옷을 해 입거나 구매하게 되었다. 의복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자 공급을 대량화하기 위하여 공장들이 생겨났고 일상복, 노동복 등의 옷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점차 한복은 일정 시기에만 입는 옷으로 점차 사라져갔고, 바느질집에서 만들어진 양복 또는 공장 의복제품 등이 대체해 나갔다. 1970년대부터 길쌈이라는 의복 풍습은 찾기가 힘들어졌으며, 재봉틀로 만든 옷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풍기인견]

영주 지역의 특산물로 풍기인견이 있다. 풍기인견은 1934년 평안남도 덕천 지역에서 명주공장을 운영하던 월남인들이 1938년 영주군 풍기면 동부동[현 영주시 풍기읍 동부리]에서 직조한 것이 풍기인견의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다. 6.25전쟁 이후 이북에 거주하던 직물공장 경영 월남민들은 풍기로 대거 이주하였고 이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풍기인견이 풍기를 대표하는 전통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풍기인견의 특징은 펄프에서 추출한 실로 만든 순수 천연섬유이며, 땀 흡수력과 통풍이 좋아 여름 의복으로 인기가 좋다. 천연섬유이기 때문에 알레르기성 피부, 아토피 피부 등의 환자에 효과적인 상품으로 현대에 들어와 가치가 크게 상승하였다. 풍기인견이라는 제품의 지역성은 이주민과 토착 주민의 협동으로 생겨날 수 있었다. 월남민들이 생존을 위해 만든 풍기인견을 풍기 사람들이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현재에 이르는 풍기인견 산업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최대의 풍기인견 산지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주민들의 생존을 보장해주고 변화를 받아들인 풍기 사람의 인심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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