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09
한자 古代
영어공식명칭 Ancient Times
이칭/별칭 삼국시대,남북국시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고대/고대
집필자 방용철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통일신라 말기까지 영주 지역의 역사.

[개설]

영주 지역에는 진한(辰韓) 소국(小國) 가운데 하나인 기저국(己柢國)이 있었다는 학설이 제기되어 있다. 영주 지역은 소백산맥의 남북 지역을 연결하는 군사 및 교통의 요충지로 중시되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북방의 고구려나 남방의 신라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500년(소지마립간 22) 9월 신라의 소지마립간이 날이군(捺已郡)에 행차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따라 500년 이전에는 신라에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의상(義湘)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해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구심처가 되었다.

[초기 국가 시대]

영주 지역에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영주 가흥리 암각화와 함께 영주시 휴천동, 영주시 풍기읍 교촌리,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영주시 장수면 반구리,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 영주시 순흥면 청구리 등지에서 고인돌이 확인되었다. 또 영주시 봉현면 대촌리풍기읍 동부리 일대에도 청동기시대 유물이 출토되어, 초기 국가의 기반이 충분히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진한의 12개 소국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기저국이 영주였다고 비정하기도 한다. 아직 기저국의 정확한 위치를 확정할 수 없지만 이와 별도로 영주 지역이 초기 국가를 성립할 수 있을 만큼 역량을 확보하였던 사실은 충분히 인정되고 있다.

[삼국시대]

영주 지역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나누어진 이북 지역과 이남 지역을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제2의 아달라이사금 편에는 “5년(158) 봄 3월에 죽령을 열었다”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158년 무렵의 신라는 아직 영주 지역까지 진출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기사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이른 시기부터 영주 지역이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지리적 배경 때문에 영주 지역은 일찍이 고구려는 물론 신라, 백제 등 주변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 왔다.

삼국시대 영주 지역의 행정구역인 내기군(奈己郡)·급벌산군(及伐山郡)·기목진(基木鎭) 등의 존재는 삼국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삼국사기』 지리지 삭주조에 따르면 내기군은 본래 백제의 영역이었지만, 파사이사금[재위 80~112]이 취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 158년에는 아달라이사금이 죽령을 개통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러한 『삼국사기』의 초기 기사를 인정한다면 영주 지역은 2세기 무렵에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2세기 무렵 신라의 영역이 소백산맥 일대까지 미쳐 영주 지역을 편입했다고 보긴 어렵고, 파사이사금이 공격하기 전에 이미 백제의 영역이었다는 것도 당시 백제·신라 양국이 모두 초기 국가 단계였음을 고려한다면, 실제 영주 지역까지 진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후대 정치·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었던 인식이 1~2세기의 내기군을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로 전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내기군은 매곡현(買谷縣)[지금의 안동시 도산면과 예안면 일대로 추정]과 고사마현(古斯馬縣)[지금의 봉화군 봉화읍 일대로 추정]을 영현(領縣)으로 두고 있었다.

급벌산군은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일대로 본래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실제 『삼국사기』 권37 지리지 고구려조의 고구려 우수주(牛首州)에 속한 지명으로 급벌산군이 보이며, 지금의 부석면 일대로 추정되는 이벌지현(伊伐支縣)을 영현으로 두고 있었다. 이는 순흥 일대가 5세기 이후 남하하던 고구려의 영향 속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현재 영주 지역의 대표적 문화 유적으로 손꼽히는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어숙묘 등의 고분은 고구려 계통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신라에 편입되기 전 영주의 재지세력은 오히려 고구려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세력을 키웠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기록으로 확인되는 광개토왕[재위 391~412] 시기의 몇 차례 남정(南征) 및 장수왕[재위 413~491] 시기 한반도 중부 지역 진출이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어숙묘 등 고구려적 특성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고분의 축조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영주 지역까지 진출하여 직접 지배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고대 영주의 지배층이 한 단계 성장하고, 지역 사회에 북방 문화적 요소가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한편, 『고려사(高麗史)』 권57 지리지의 경상도 안동부 기주현(基州縣) 항목에 “기주현의 신라 때 칭호는 잘 알 수 없다. 혹은 기목진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에 지금의 지명으로 불렸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기목진은 설치 연혁이 명확하지 않으나,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일대에 설치된 군진(軍鎭)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군진은 변경 지역에 설치되었던 만큼, 기목진이 설치된 시기는 신라가 소백산 이북 지역으로 진출하기 이전일 것이다. 이를 고려한다면 영주 지역이 신라에 편입된 이후 고구려의 세력 침투를 방어하기 위한 핵심 기능을 담당하였고, 그에 따라 기목진이 설치 및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삼국시대 영주 지역은 삼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역이었으나, 5세기 후반 무렵에는 신라 영역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500년 9월에 소지왕[소지마립간]이 날이군에 행차하였다가, 파로(波路)의 딸 벽화(碧花)를 만났다는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또, 어숙묘에서 확인된 명문의 ‘을묘년어숙지술간(乙卯年於宿知述干)’ 가운데 술간(述干)이 6세기 초부터 확인되는 신라의 외위(外位)이다. 즉, 6세기 이전에 이미 신라의 국왕이 영주 지역에 직접 행차하였고 신라의 외위가 설치된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신라가 영주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영주 지역을 경상도 밖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삼았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통일신라시대]

군사 및 교통 측면에서 핵심 요충지로 중시되었던 영주 지역은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어 새로운 역사적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우선 삼국통일 후 신라는 전국을 9주 5소경 체제로 재편하였는데, 이때 영주 지역은 옛 고구려 영토에 해당하는 삭주(朔州) 아래에 편제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는 군현제를 강화하고, 명칭을 한자식으로 아화(雅化)하는 과정에서 행정구역의 명칭이 크게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내기군내령군(奈靈郡), 내기군의 영현이었던 매곡현과 고사마현은 선곡현(善谷縣)과 옥마현(玉馬縣), 급벌산군급산군(岋山郡), 급벌산군의 영현이었던 이벌지현은 인풍현(隣豊縣)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한편, 통일신라시대 영주 지역은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한 축을 장식하게 된다. 7세기 후반 문무왕의 명에 따라 의상이 영주 지역으로 옮겨와 부석사를 창건하면서, 통일국가에 걸맞은 화엄사상 중심의 새로운 불교를 구성하게 된다. 의상은 한국 화엄종의 개조(開祖)로서 부석사 중심의 한 계파를 형성하였고, 이후 부석사는 전국에 산재한 화엄십찰(華嚴十刹)의 첫 번째 도량으로서 불교계의 구심점이 되었다. 부석사의상의 손제자 신림(神琳)이 활동하던 8세기 전반 무렵에는 1,000명의 대중이 강론을 듣기 위해 모일 만큼 크게 번창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