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18
한자 高句麗南下
영어공식명칭 Goguryeo’s Southward Advance
이칭/별칭 고구려 남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방용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장소 고구려 남하 - 경상북도 영주시
종결 장소 고구려 남하 - 경상북도 영주시

[정의]

5세기 이후 고구려의 남하로 인한 영주 주변의 상황.

[개설]

고구려는 광개토왕[재위 391~412]과 장수왕[재위 413~491] 시대에 걸쳐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특히 장수왕이 475년(장수왕 63) 한성[지금의 서울]을 공격해 백제의 개로왕을 살해했을 무렵에는 신라 내정을 간섭하는 한편, 죽령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주 지역도 이때 고구려의 영향력에 아래에 들어갔으며, 이와 관련된 역사 및 문화적 자취가 남아있어 주목된다.

[역사적 배경]

4세기 이후 한반도 중부 지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 간 경쟁이 심화되었으며, 무력충돌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371년(고국원왕 41) 10월 평양성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게 됨으로써, 양국은 숙적 관계가 되었다. 광개토왕은 즉위 직후부터 백제를 적극적으로 공략해 우위를 확보하였으며, 400년(광개토왕 10) 왜(倭)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5만의 대군을 파견하여 한반도 남부의 임나가라(任那加羅)[지금의 경상남도 김해로 비정]까지 대규모 정벌을 시행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따르면, 이때의 남정(南征)을 계기로 신라왕이 친히 고구려에 조공하였다고 한다.

427년(장수왕 15) 평양 천도 이후 고구려의 남하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454년(장수왕 42) 7월 고구려군의 신라 북쪽 변경 공격과 468년(장수왕 56) 실직주성(悉直州城) 점령, 475년(장수왕 63) 9월 백제의 도읍이었던 한성 함락과 개로왕 살해로 이어졌다. 이후 장수왕은 481년(장수왕 69) 신라 미질부(彌秩夫)[지금 포항시 흥해읍으로 비정]까지 진군하였으며, 489년(장수왕 77) 9월에는 호산성(狐山城)을 점령하기도 했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웅략천황(雄略天皇) 8년조 기사에 따르면 464년(장수왕 52) 무렵 신라 도읍 안에 고구려의 군사 100명이 주둔하였던 사실이 보여, 고구려의 신라 내정 간섭이 오랜 기간 지속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지금의 영주 지역도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다.

[경과]

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南北朝)에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국제관계를 안정시키는 한편, 한반도 남부의 백제 및 신라에 대한 공략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였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하를 경계하여 우호 관계를 형성하였는데, 이를 대체로 나제동맹이라고 부른다. 고구려는 454년, 468년, 475년(장수왕 63), 481년, 489년에 걸쳐 백제와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남방으로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다만 481년에 미질부까지 진군하였다가 나제동맹군에 패퇴한 이후 고구려의 남하 행보는 교착 상태에 빠져든 것으로 보인다.

영주 지역은 이른 시기부터 소백산맥을 왕래하는 통로로써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특히 400년 고구려의 대규모 남정 이후 5세기 말엽까지 영주 지역은 정치 및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고구려가 영주 지역을 직접 장악하거나 군사를 주둔시켰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어숙묘(於宿墓) 등이 고구려적 특성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영주의 재지 세력이 5세기 무렵 고구려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성장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한편 『삼국사기』 권37 지리지 고구려조에는 현재의 영주 지역인 급벌산군이 본래 고구려의 우수주(牛首州)에 속하였으며, 급벌산군의 속현(屬縣)이었던 이벌지현(伊伐支縣) 역시 고구려의 옛 지명으로 전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500년(소지마립간 22) 9월에 왕이 날이군(捺已郡)[내기군, 지금의 영주]에 행차하였다가 파로(波路)의 딸 벽화(碧花)를 만난 이야기가 전한다. 따라서 늦어도 5세기 말엽 영주 지역은 확실히 신라의 영역에 속하였으며,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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