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31
한자 榮川郡
영어공식명칭 Yeongcheon-gun
이칭/별칭 구성(龜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
집필자 박소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413년연표보기 - 영주에서 영천군으로 개정
개정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 경상도 영천군에서 경상북도 영천군으로 편제
개정 시기/일시 1914년 - 영천군·풍기군·순흥군을 영주군으로 통폐합

[정의]

1413년부터 1914년까지 영주 지역에 설치된 지방행정구역.

[개설]

영천군(榮川郡)은 1413년(태종 13)부터 1914년까지 설치되었던 행정구역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시내 지역과 영주시 이산면·장수면·평은면·문수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에는 전국 군현의 읍격을 경(京)·주(州)·부(府)·군(郡)·현(縣)으로 구분하고 이에 상응하는 관품의 외관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군현의 명칭 및 읍격이 파견되는 외관과 일치하지 않는 예가 많아, 조선 건국 초기부터 군현 명칭에 대한 개정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413년(태종 13)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에 이루어져 지영주사(知榮州事)가 파견되던 영주(榮州)는 경상도 영천군이 되었으며, 지방관은 종4품의 군수(郡守)로 대체되었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1413년 영천군의 설치 연혁 및 관원 등이 소개되어 있다.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 혁파에 따른 영역 분속과 환속은 『세조실록(世祖實錄)』과 『숙종실록(肅宗實錄)』에 그 내용이 보인다.

[변천]

『세종실록지리지』 권150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영천군 편에 따르면, “고종 46년[1259] 무오에 위사공신 김인준(金仁俊)[김준]의 외향이라 하여 지영주사로 올렸다가, 본조 태종 계사[1413]에 예(例)에 의하여 영천군으로 고쳤다. 별호는 구성(龜城)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 순안현(順安縣) 지역이었는데 고을의 읍격이나 규모와 관계없이, 단지 공신의 외향이라 하여 영주로 승격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고을의 규모를 감안하여 1259년 설치된 영주의 읍격을 영천군으로 조정하였다.

1457년(세조 3) 순흥도호부에 위리안치되어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도호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단종복위운동을 모의하다 실패로 끝난 사건이 발생하였다. 단종복위운동으로 세조는 순흥도호부를 역향(逆鄕)으로 지목하고 고을을 혁파해 버렸다. 순흥도호부 영역을 이웃한 영천군풍기군·봉화군으로 분속시켰다. 『세조실록』 권10 3년 11월 기축 기사에는 “마아현(馬兒峴) 냇물[川] 이서(以西)와 소백산 대령(大嶺) 이서는 모두 풍기군에 속하게 하고, 마아현 아래 냇물 이동(以東)과 문수산(文殊山) 아래 냇물 이서, 그리고 파문단곶(破門丹串) 냇물 2리(里)는 영천군에 속하게 하며, 문수산 아래 냇물 이동은 봉화현에 속하게 하면 …”이라며, 분속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단종이 신원되고 1683년(숙종 9) 순흥도호부가 복설됨으로써, 영천군에 분속되었던 옛 순흥도호부 땅도 환속되었다.

개항기 이후 다시 전국적인 지방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졌다. 조선 정부는 제2차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895년(고종 32) 5월 26일[음력] 반포된 칙령 제98호 「지방제도개정에 관한 건」에 따라, 1895년 윤5월 1일[양력 6월 23일] 부로 기존 8도 체제를 23부 체제로 개편하고,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을 부와 군으로 이원화하면서 전국이 23부 337군 체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영천군은 23부 가운데 안동부(安東府) 영천군에 편제되었다. 이어 1895년 9월 5일[음력] 반포된 칙령 제164호 「군수의 관등 봉급 건과 각 군의 분등표」에 의거하여 영천군은 4등급 군으로 매겨졌다.

그러나 지방행정 혼란으로 1896년(건양 1) 8월 4일[양력] 반포된 칙령 제36호 「지방 제도와 관제 개정에 관한 안건」에 의거해 23부가 13도 체제로 개편되면서 경상북도 영천군에 편제되었다. 1906년 9월 24일 반포된 칙령 제49호 「지방구역정리건」에 따라 영천군 임지면이 봉화군에 편입되었다.

‘영천군’이란 행정구역은 1914년 4월 1일 실시된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소멸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효율적인 식민 지배를 위하여,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한 방대한 국토 자료를 바탕으로 전국을 13도 12부 220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영천군은 기존 임지리(林只里)·고감어리(高甘於里)·안퇴일(安退逸)·창팔래(昌八來)·황분토(黃墳土)·두월(斗月)·매곡(每谷)·우안촌(愚安村)·장병곡(藏兵谷)·구수천(九水川)·호마곡(呼馬谷)·가자동(加槽洞) 등 12방(坊)을 봉화군에 이속하고, 풍기군·순흥군을 통합하여 영주군(榮州郡)이 되었다. ‘영천’이 ‘영주’로 바뀐 것은 ‘영천(永川)’과 발음이 동일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영천군의 존재는 전통시대 지방행정구역 구획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로, 1413년 기존 영주를 영천군으로 조정한 것은 인적 연고로 승강된 고을의 읍격을 현실적으로 바로잡은 것이다. 조선시대 단종복위운동에 따라 순흥도호부의 영역을 이웃 고을에 합속시켰다가 다시 환속한 것도 이러한 인적 연고와 관련되어 있다. 한편, 개항기 이후 영천군의 존재는 근대적 지방행정제도의 개편 과정과 특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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