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교육구국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45
한자 新敎育救國運動
영어공식명칭 New Education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삼조

[정의]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영주 지역에서 근대교육을 배우려는 움직임과 학교 설립 운동.

[개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의 요체는 ‘실력’과 ‘힘’을 길러 일본제국주의로부터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으로는 언론계몽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 국채보상운동, 신문화운동, 신문학운동, 국학운동, 민족종교운동, 해외독립기지건설운동, 신교육구국운동 등이 있다.

대한제국 시기 신교육구국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단체로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서북학회(西北學會), 호남학회(湖南學會), 기호학회(畿湖學會),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관동학회(關東學會), 신민회(新民會) 등이 있다. 또 경북 지역에서는 대구광문사, 대동광문회, 대구광학회, 달성친목회, 강의단, 봉성광학회, 영북학회, 경주군교육회, 간친교육회, 운산친목회 등이 신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렇듯 많은 단체가 신교육구국운동을 펼쳤고, 그 결과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전국적으로 3,000~5,000여 개에 이르는 사립학교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신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영주 지역에서도 근대 학교가 설립되어 민족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근대 학교 설립 운동]

대한제국기 영주 지역에 설립된 근대 학교로는 흥주소학교(興州小學校)[사립소흥학교로 개칭], 사립안정학교(私立安定學校), 사립강명학교(私立綱明學校), 사립조양학교(私立朝陽學校), 기독내매학교(基督乃梅學校)가 있었는데, 관립학교인 흥주소학교 외에는 모두 사립학교이다. 당시 영주 지역 신교육구국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은 군수·순사 등 관료 출신 인사, 애국 계몽 단체 및 독립운동 단체 소속 인사, 기독교 단체 인사로 구분할 수 있다.

1. 흥주소학교[지금의 순흥초등학교]

1906년 3월 고종의 「흥학조칙(興學詔勅)」과 경상북도관찰사 신태휴의 「흥학훈령(興學訓令)」이 발표되면서, 순흥군수 정재학에 의해 1906년 4월 7일 신식학교인 흥주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이후 새로 부임한 김창수가 관립이었던 흥주소학교를 사립소흥학교로 개칭하고, 김창수 자신이 직접 교장을 맡았다. 그러나 신식교육에 반감을 보이던 의병들의 습격으로 1907년 11월 11일 교사로 활용되던 관청 건물이 불타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김창수는 1908년 5월 봉서루에 반 양옥 교사를 새로 짓고 사범속성과 50명, 보통과 50명 학생을 교육했다.

3년제였던 사립소흥학교는 1909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사립소흥학교는 신식교육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교사를 길러내는 1년 과정 사범속성과도 갖추고 있었다. 사범속성과의 교과 과정은 한문, 작문, 수신, 지지, 역사, 물리, 경제, 산술, 어학, 체조 등이었다. 그런데 사립소흥학교 운영을 주도한 세력은 교남교육회 소속 영주 출신 인사들이었다. 1909년 당시 교감이었던 정호익을 필두로 교사 이윤갑, 송주면, 이만하 등이 모두 참여하였다.

2. 사립안정학교[지금의 풍기초등학교]

1908년 5월 20일 수업 연한 3년제의 사립학교로 인가받았으며, 풍기군주사 권병선, 풍기주재소 순사 이인수, 향원 황재진·황덕주 등이 설립을 주도하였다. 1909년에는 권병선이 풍기군수로 승진하면서 사립안정학교가 학부로부터도 인가를 받았다. 이 무렵 사립안정학교의 학생 수는 1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총무 이풍환, 교감 장상희, 교사 신희균·한상오는 모두 교남교육회 출신이다.

3. 사립강명학교[지금의 영주초등학교]

1903년 영천군(榮川郡)의 유력 문중들이 합심해서 설립한 신식학교이다. 향서당 건물을 교사로 활용하였으며, 학생 수는 20~30명 정도였다. 교사 가운데 박제선은 훗날 풍기광복단[대한광복단]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4. 사립조양학교

1908년 순흥군 수식면 압동[지금의 봉화군 물야면 압동리]의 조양서당에 세워진 신식학교이다.

5. 기독내매학교[평은국민학교 내명분교장, 현재 폐교]

1910년 4월 5일 내매교회 안에 기독내매학교가 설립되었다. 기독내매학교는 20세기 영주 지역을 대표하는 인사들을 여럿 배출시킨 학교이다. 이 가운데 강병주(姜炳周)[1882~1955]는 기독내매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제9회 졸업생 강신명(姜信明)[1909~1985]은 세계선교사훈련원장, 연세대학교 이사장 등을 역임한 한국 기독교계의 원로이다.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정책]

일본은 「사립학교령」[1908], 「사립학교 규칙」[1911], 「서당 규칙」[1918] 등을 제정해 민족교육의 하나로 설립한 사립학교를 강제로 폐교하거나, 설립을 인가하지 않았다. 설사 인가를 받더라도, 다수 사립학교는 상급 교육기관으로 진학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부 사립학교는 공립학교로 전환해 민족교육의 뿌리를 잘라 내었다.

이러한 일본의 식민지 학교 설립 및 운영정책은 영주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이에 사립소흥학교는 1911년 9월 8일 순흥공립보통학교로, 사립안정학교는 1912년 풍기공립보통학교로, 사립강명학교는 1911년 영천공립보통학교로 설립 재인가를 받게 되고, 사립조양학교는 1911년 폐교되었다. 기독내매학교를 제외한 모든 신식학교가 강제로 폐교되거나 공립학교로 전환되었다.

[의의와 평가]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영주 지역에서 일어난 신교육구국운동은 일본에 의해 탄압을 받았지만, 그 명맥은 일제강점기에도 유지되어 사립내매학교를 필두로 각종 학술강습회, 서당 및 야학, 비인가 사립학교 등이 영주 지역의 민족교육·문맹 퇴치·계몽운동을 주도해 나가게 된다.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 설립되었던 용산강당[현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 1910년대], 영주강습회[현 영주시 영주동, 1924], 용상학술강습회[현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1924], 아도서숙(亞島書塾)[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1928], 기독교여자야학회[영주제일교회 내, 1920년경], 영흥노동야학회[현 영주시 가흥동, 1920], 금계노동야학[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1923], 영주부녀야학[영주공립보통학교 내, 1925], 신암야학[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1928], 농촌야학[현 영주시 풍기읍 백리, 1939] 등이 바로 대한제국기 신교육구국운동의 명맥을 이어간 교육 단체들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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