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64
한자 榮州農民組合
영어공식명칭 Yeongju Peasant Associ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9년 3월연표보기 - 영주농민조합 설립
최초 설립지 영주농민조합 - 경상북도 영주시
성격 농민단체

[정의]

1929년 영주 지역에 설립된 농민단체.

[개설]

영주농민조합(榮州農民組合)은 1929년 3월 개최된 제3차 풍기농우동맹 정기대회에서 풍기농우동맹을 해체하고 창립하였다. 영주농민조합은 군 단일 농민조직으로 이후 지부 설치에 집중하였다.

[설립 목적]

영주농민조합은 영주 지역 내 단일 농민조직을 결성하고, 그 과정에서 기존 소작인 조합을 농민조합으로 확대·개편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변천]

영주농민조합은 1931년 이후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으로 확대·발전하게 된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영주농민조합은 조합 결성 후 지부 설치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일제 관헌의 탄압과 방해로 지부 설치는 더디게 이루어졌다. 가장 먼저 설치된 영주농민조합 지부는 영주군 풍기면 금계리에 위치한 영주농민조합 금계지부였다. 영주농민조합 금계지부는 1924년 1월에 결성된 일꾼회가 전환한 것이었다. 일꾼회는 풍기면 금계리에 사는 풍기소작조합의 주요 활동가들이 회원 간 상호 친목·상호 원조·경제생활 향상 등을 목표로 조직한 단체였다. 일꾼회에서는 1929년 3월 16일 제6회 정기대회를 개최하고, 경찰의 방해 속에서도 영주농민조합 금계지부로의 회체 변경을 결정하였다. 또 새로운 임원으로 위원장에 황시흠(黃時欽), 후보 김선영(金善永)이 선임되었고, 위원으로는 권영철·신창균(申昌均)·김길상·김대규(金大奎)·황재학(黃在學)·김종세(金鍾世)·이경희(李景熙) 등 12명이 선임되었다. 이 자리에서 회관 수리, 임금 조정, 유지비, 공동작업 문제 등을 토의하였다.

영주농민조합 이산지부는 기존 신암농민회를 해체하고, 통합·설립했다. 1929년 4월 1일 개최 예정의 창립대회가 경찰의 간섭으로 연기되어, 1929년 4월 5일 100여 농민이 참가한 가운데 다시 개최되었다. 경찰의 대회 방해를 받으면서도 규약을 통과시켰고, 김용현·김세창(金世昌)·김낙영·김만수(金萬秀)·김제환(金濟煥) 등 5명의 전형위원을 선임한 뒤, 만세 삼창과 함께 폐회하였다. 그 외에도 1929년 4월 16일 영주군 영주면 영주리에서 영주농민조합 영주지부 창립대회를 개최하려고 했지만, 경찰의 갑작스러운 금지 조치로 지체되었다. 이처럼 지부 설치가 원만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1929년 6월 현재 조합원 수는 2,352명에 이르러, 영주 지역 최대 농민단체로 자리매김하였다.

[의의와 평가]

영주농민조합은 당시 경북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농민조합으로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1930년대 혁명적 농민조합운동과 반제 운동으로 계승되면서, 농민운동의 확대 발전에 이바지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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