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조합운동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65
한자 農民組合運動
영어공식명칭 Union Movement of Farmer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농민조합운동 발생
발생|시작 장소 농민조합운동 - 경상북도 영주시
성격 농민운동
관련 인물/단체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영주적색노동조합건설위원회

[정의]

1930년대 영주 지역에서 전개된 혁명적 농민운동.

[개설]

세계 대공황 이후 점증하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대대적인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식민지 조선에서는 농민운동이 1920년대 후반부터 민족운동으로 확대·발전하는 가운데, 일제의 정책에 대응하여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전개되었다. 영주의 농민조합운동은 1931년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시작으로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 영주적색노동조합건설위원회 등의 설립으로 발전해 나갔다.

[역사적 배경]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자본주의의 위기에 빠진 일제는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전국적 차원의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농촌진흥운동은 궁극적으로 조선 농민을 자작농으로 전환시켜, 진정한 ‘천황의 신민(臣民)’, ‘일본 국민’이 될 수 있도록 ‘개량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기치 아래에 ‘자작 농지 설정 사업’, ‘자작농 창정 사업’을 실시하였다. 또 소작권을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1932년 「소작조정령」, 1934년 「조선농지령」 등을 공포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은 1920년대 후반부터 농민운동이 민족운동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에 대한 위기감에서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일제가 농촌진흥운동을 통해 농민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나가자, 농민들은 농민조합운동을 통해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경과]

영주의 농민조합운동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1931년부터 1932년 전반까지 전개된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의 활동이다.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는 1931년 후반부터 조직화가 시작되어, 1932년 4월에 결성이 이루어졌다. 1931년 8월 서울의 신간회 대회에 참석한 김봉호(金鳳鎬)는 영주 출신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 박승원(朴勝源)으로부터, 서울의 운동 상황을 설명 듣고 영주에서 혁명적 대중운동을 일으킬 생각을 하게 된다. 다음 달인 1931년 9월 김봉호는 영주에서 김계등(金季登)·김화진(金華鎭)·박병성(朴炳星)·정규찬(丁奎燦) 등을 만나 농민운동 및 반제동맹을 전개할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1931년 10월경 영주군 영주면 고현리와 휴천리 소나무 숲속에서 회합했다.

1932년 3월경에는 협의회 설치를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고, 1932년 4월 혁명적 농민조합 및 반제동맹을 설립하기 위한 비밀결사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책임자는 김계등이며, 조직은 농민조합과 반제동맹으로 구성되어 있다. 혁명적 농민조합의 목적은 노동자·농민에 의한 독재 정부 수립에 있었고, 반제동맹의 목적은 조선의 독립 도모와 농업혁명의 실현이었다.

1932년 2월 영주공산주의협의회는 봉화적색농민조합 및 예천무명당과 연계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는 초기 단계에서 일제 관헌의 탄압으로 좌절되었고, 봉화와 예천의 운동도 와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1933년 1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김봉호·김계등·박병성·김준상·황윤경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김화진·권태동·권우섭(權宇爕)·김창희(金昶熙)·권차응(權次應)은 징역 2년 6개월, 이상을(李相乙)·전영우(全永右)는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았다.

두 번째는 1932년 10월 영주에서 조직된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의 활동이다.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는 안동콤그룹과 연계해 조직되었다.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의 좌절 이후 영주 지역 농민조합운동의 침체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하에 새로운 비밀결사를 준비하였고, 그 결과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은 적농부와 반제동맹부로 명확히 구분하여, 전자는 농민층, 후자는 소브루주아층을 대상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는 독서회를 만들어 공산주의 이론을 연구하고, 러시아혁명기념일이나 메이데이 등을 기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 가운데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는 1933년 5월 메이데이를 맞아 봉화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와 함께 공동투쟁을 벌일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 계획이 일제 관헌에 의해 발각되어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고, 조직은 와해되고 말았다. 1934년 7월 2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열린 재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주동자 김종진·김명진은 징역 2년 6개월, 김계진은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았다.

세 번째는 서울의 전조선적색노동조합준비위원회 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1935년 5월 16일 결성된 영주적색노동조합건설위원회의 활동이다. 전조선적색노동조합준비위원회의 경북 책임자 정길성이 영주의 사회운동가와 연대해 혁명적 노동조합 및 농민조합운동을 펼친 결과였다. 하지만 영주적색노동조합건설위원회 활동 역시 일제의 탄압으로 와해되었으며, 영주 지역 주동자들은 체포되었다. 1938년 2월 28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 재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을 적용받아 주동자 정길성은 징역 6년, 박승원은 징역 3년 6개월, 권학석과 김재욱은 각각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았다.

[의의와 평가]

1930년대 영주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지속적인 비합법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비록 1930년대 중·후반 일제의 탄압으로 와해되었지만, 1930년대 영주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1940년대 일제의 전쟁동원정책에 맞선 투쟁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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