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472
한자 榮州浮石寺祖師堂
영어공식명칭 Josadang Shrine of Buseoksa Temple, Yeongju
이칭/별칭 부석사 조사당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51]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박병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377년 - 영주 부석사 조사당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493년 - 영주 부석사 조사당 중수
개축|증축 시기/일시 1916년 - 영주 부석사 조사당 해체·수리
문화재 지정 일시 1962년 12월 20일연표보기 - 영주 부석사 조사당 국보 제19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영주 부석사 조사당 국보 재지정
현 소재지 영주 부석사 조사당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51]지도보기
원소재지 영주 부석사 조사당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51]
성격 불전
양식 주심포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부석사
관리자 부석사
문화재 지정 번호 국보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에 있는 고려 후기 불전

[개설]

영주 부석사 조사당(榮州浮石寺祖師堂)은 고려 후기에 건립된 목조 건축물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의 목조 건축물로서 내부에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義湘大師)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또 영주 부석사 조사당 건물 내부 입구 좌우에 제석천·범천·사천왕상을 그린 부석사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6폭이 그려져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벽화를 분리하였다. 부석사 조사당벽화는 분리 이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에 보관해 오다가 지금은 부석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위치]

영주 부석사 조사당영주시 부석면 북지리에 소재한 부석사 경내 가장 깊은 곳에 있다. 부석사의 중심 건물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우측 위쪽 산기슭에 있다.

[변천]

영주 부석사 조사당의 건립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영주 부석사 조사당은 1916년에 해체·수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장여에서 고려시대 중건과 조선 초기의 공사 내용이 기록된 묵서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묵서에 따르면, 영주 부석사 조사당은 1377년(우왕 3)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중수했다고 한다. 또 영주 부석사 조사당 어칸 도리에 명기된 중창기에는 1490년(성종 21)에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493년(성종 24)에 단청을 하였으며, 1573년(선조 6)에는 지붕을 보수하였고, 1709년(숙종 35)에는 기와를 교체하였다. 1985년에는 부석사 조사당벽화를 모사하여 복원하였다. 1996년에는 서까래와 기와를, 2005년에 도리 등 부식된 목재와 함께 기와를 교체하였다.

[형태]

영주 부석사 조사당의 평면구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규모가 작고 세부 표현이 간결한 모습이다. 정면 가운데에는 살문을, 그 좌우 옆 칸에는 붙박이 살창을 달았다. 옆면과 뒷면은 모두 벽으로 막혀 있다. 기둥은 배흘림이 약화하였고 그 위에는 주두(柱頭)를 얹기 전에 헛첨차를 끼워 공포를 받치고 있다.

기단은 면석과 갑석으로 조성하였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약간의 배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공포는 외부에 출목이 있는 간단한 형식으로 장식이 없다. 첨차는 상부 공안(栱眼)을 완전히 따내 확실하게 눈에 띈다. 가구 구조는 5량 구조로서 제공(齊工) 위에 대들보를 걸치고 그 위에 포대공을 놓아 종보[종량(宗樑)]를 받쳤다. 종보 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대공과 소로를 놓아 종도리 장여와 종도리를 받게 했으며, 종도리 하부에는 인(人)자 모양의 솟을합장을 결구하였다. 솟을합장은 종보의 윗면을 비스듬히 파내고 솟을합장을 꽂은 후 쐐기를 박아 튼튼하게 결구하였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정면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이고 배면 처마는 서까래만 사용한 홑처마이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본래 전돌을 깔았으나 지금은 참배가 편리하도록 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천정은 연등천장을 올렸다.

[현황]

영주 부석사 조사당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9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보로 재지정되었다. 영주 부석사 조사당 추녀 아래에 부석사 선비화(禪扉花)라고 불리는 골담초 한 그루가 있다. 『택리지(擇里志)』에는 의상대사부석사를 창건한 후 도를 깨치고 서역 천축국[인도]으로 떠날 때 지팡이를 꽂으면서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잎이 날 터이니 이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것으로 알라.’라고 했다는 내용의 나무를 선비화라 한다. 부석사 선비화는 현재 철장에 둘러싸여 보호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영주 부석사 조사당은 평면 계획과 가구 구조, 부재의 형태와 치목 방법 등이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건축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의 건축물과 달리 장식이 절제되어 있다. 또한, 부석사 조사당벽화는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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