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504
한자 榮州近代歷史文化-
영어공식명칭 Yeongju Modern History and Culture Street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지명/시설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두서길|경상북도 영주시 광복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태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18년 8월 6일연표보기 -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국가등록문화재 제720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국가등록문화재 재지정
최초 설립지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 경상북도 영주시 두서길 73-6[영주동 149-12] 외 152필지
현 소재지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 경상북도 영주시 두서길 73-6[영주동 149-12] 외 152필지지도보기
성격 근대역사문화거리
면적 26,377㎡[153필지]
문화재 지정 번호 국가등록문화재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일대에 있는 근대역사문화거리.

[개설]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영주 지역의 철도 역사와 그 배후에 형성된 철도관사, 정미소, 이발관, 근대 한옥, 교회 등 지역의 근대 생활사 요소를 간직한 건축물이 집적되어 있다.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2018년 8월 6일 국가등록문화재 제720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등록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영주시 영주동 관사골에서 광복로 일대의 거리로서 20세기 초 영주의 근대 생활사를 보여주는 역사문화공간으로서 보존과 활용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에 문화재청은 2018년 이러한 근대문화유산의 효과적인 보존 활용을 위하여, ‘선(線)’과 ‘면(面)’ 단위의 문화재 등록 제도를 새로 도입하기로 했으며, 그 첫 사례로서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가 등록문화재로 선정되었다.

[구성]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는 등록문화재 제720-1호인 구 영주역 5호 관사[영주시 두서길 57], 등록문화재 제720-2호인 영주역 7호 관사[영주시 두서길 63], 등록문화재 제720-3호인 영주동 근대 한옥[영주시 구성로422번길 21], 등록문화재 제720-4호인 영주 영광이발관[영주시 광복로 15], 등록문화재 제720-5호인 영주 풍국정미소[영주시 광복로 23], 등록문화재 제720-6호인 영주제일교회[영주시 광복로 37] 등 모두 여섯 곳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황]

구 영주역 5호 관사와 구 영주역 7호 관사는 일제강점기 때 영주역 관사로 건립된 2호 연립주택이다. 목조 일식 관사 주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 중 하나로 내부 공간구성, 외관 형태, 구조 및 재료의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1942년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영주역이 중간역의 역할을 하게 되고, 이것이 영주시가 근대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 일대는 철도 집단 관사로 인해 ‘관사골’이라 불리며 발전해 왔기에, 도시 생활사적 보존과 활용가치가 높은 곳이다.

영주동 근대 한옥은 옛 고택의 별채로 1920년에 신축한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원래 영주시 영주동 근대 한옥 본채는 조선 전기 영주 지역 출신 명의 이석간(李碩幹)[1509~1574]에게 명나라 황제가 지어주었다고 한다. 명나라 황제의 어머니가 불치병에 걸렸었는데, 이석간의 치료로 환후가 쾌차하였기에 99칸짜리 본채와 별채 여러 채로 된 기와집을 보답으로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본채는 근대 이후 사라지고 안영빌라가 그 위치에 신축되었다. 1920년에 신축한 별채만 남아 있는데, 개량한옥으로서 ‘ㅁ’자 형태이며, 정면 7칸, 측면 6칸 규모이다. 고택의 별채로 한옥 주택의 건축 형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의원과 하숙집으로 사용되어 일제강점기와 근대산업 시기의 생활상이 축적되어 있다.

영주 영광이발관은 8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발관이다. 1930년대 광복로 남쪽 도로변에서 ‘국제이발관’으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시온이발관’을 거쳐, 지금의 ‘영광이발관’에 이르고 있다. 영주 영광이발관의 이발사 이종수는 1970년경 시온이발관을 인수하여 현재까지 영업하고 있다. 영주 영광이발관 건물의 경우 1950년대 근대산업 시기에 건축된 목조 및 슬레이트 구조로 완성도는 높다고 할 수 없지만, 영주 지역에서 80년 동안 지속한 장인의 이용업 생활사를 보여주는 사례이며, 업계의 변화와 특성 및 기술을 간직하고 있기에 생활사적 가치가 높다.

영주 풍국정미소는 근대산업 시기부터 운영된 정미소로 양곡가공업의 생성과 양곡 유통과 관련된 역사, 옛 정미소의 건축 형식과 설비 구조, 도정 기기와 저울[막대 저울, 판수동 저울] 등 옛 정미소와 관련된 기구 등을 간직하고 있다. 양곡 가공과 곡물 유통을 주제로 산업 문화관, 쌀 카페, 도정 참관 및 판매장으로 활용가치가 높은 곳으로 평가된다.

영주제일교회는 영주의 근대화 과정과 함께 하는 교회이다. 1907년 정석주 집에서 기도 모임이 시작되었고, 1909년 4월 구성공원 아래쪽 초가 3칸을 매입하여 경북노회에 가입한 뒤 영주교회를 설립하였다. 1938년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목사와 장로·전도사들이 구금 또는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영주제일교회6.25전쟁 중에 소실되었다가 1954년 5월 1일 기공 후 신도들의 노역 봉사로 1958년 7월 25일 준공되었다. 영주제일교회는 서양 고딕식 건축양식을 빌린 절충 양식의 예배당 근대건축물로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근대산업 시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영주 시민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 생활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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