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574
한자 決凝
영어공식명칭 Gyeoleung
이칭/별칭 혜일(慧日),원융(圓融)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위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964년연표보기 - 결응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975년 - 결응 용흥사에 출가
활동 시기/일시 991년 - 결응 승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041년 - 결응 부석사 주석
활동 시기/일시 1047년 - 결응 국사 책봉
몰년 시기/일시 1053년연표보기 - 결응 사망
추모 시기/일시 1054년 - 결응 부석사원융국사비 건립
출생지 결응 출생지 - 강원도 강릉시
학교|수학지 결응 주석처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57]지도보기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국사

[정의]

고려 전기 영주 부석사에서 주지를 지낸 승려.

[개설]

결응(決凝)[964~1053]의 자는 혜일(慧日), 시호는 원융(圓融), 법명은 결응이다. 속성은 김씨로 증조할아버지는 명주(溟州) 호족 김영길(金英吉), 할아버지는 장보(章保), 기연(器璉), 굉홍(宏洪)을 역임한 김선희(金善熙), 아버지는 금곡경(金穀卿) 김광률(金光律)이다. 어머니는 내의령(內議令) 강명(康明)의 딸인 강릉군부인(江陵郡夫人) 방씨(方氏)이다.

[활동 사항]

결응은 어릴 때 꿈속에서 귀산사(龜山寺)로 향하던 중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너의 품속에 두 개 거울이 있는데 하나는 해이고, 하나는 달이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훗날 결응은 자신의 자를 ‘혜일’로 삼게 되었다. 975년(광종 26)에 용흥사(龍興寺)에서 출가하였으며, 복흥사(復興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991년(성종 10) 승과에 합격하여 목종 연간에 대덕(大德)을 거쳐 대사(大師)의 법계를 받았다. 현종 연간에는 수좌(首座)가 되었으며, 정종 연간에 승통(僧統)의 자리에 올랐다. 이어 즉위한 덕종은 결응을 궁궐 동쪽 묘지사(妙智寺)에 주석하게 하였다. 1041년(정종 7) 봉은사(奉恩寺)에서 왕사(王師)에 책봉되었다. 1041년 결응은 정종에게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머물 것을 청하여 입적할 때까지 주석하게 된다. 1043년 문덕전(文德殿)에서 기우제를 지내며 『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였는데, 이때 단비와 천화(天花)가 내렸다고 한다.

결응은 1047년(문종 1) 국사(國師)에 책봉되었다. 만년에 결응은 고향 강릉에 사찰을 건립하였는데, 왕이 ‘화엄안국사(華嚴安國寺)’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입적하기 직전 문도들에게 인사(印寫)한 대장경 일부를 화엄안국사에 봉안하라고 유언하였다. 현재 부석사(浮石寺)에 전해지고 있는 화엄경판이 이때 인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053년(문종 7) 부석사에서 입적하니 나이는 90세이고, 승랍(僧臘)은 78세였다.

[사상과 저술]

결응은 화엄종의 고승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광증(廣證), 구관(口觀), 증해(證海), 수난(秀蘭), 작현(作賢), 원창(元昶) 등 1438인의 제자를 두었다.

[상훈과 추모]

결응이 입적하자 문종은 ‘원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054년(문종 8) 왕명에 의해 부석사 원융국사비(浮石寺圓融國師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가 부석사에 건립되었는데, 예부시랑 고청(高聽)이 비문을 짓고, 상서 도관낭중 임호(林顥)가 비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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