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595
한자 金埅
영어공식명칭 Kim Bang
이칭/별칭 거경(巨卿),쌍암(雙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06년연표보기 - 김방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29년 - 김방 생원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38년 - 김방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42년 - 김방 명릉별검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57년 - 김방 사간원정언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59년 - 김방 자인현감 부임
몰년 시기/일시 1778년연표보기 - 김방 사망
거주|이주지 김방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김방 부임지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묘소|단소 김방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용혈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선성(宣城)
대표 관직 명릉별검|예조정랑|자인현감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김방(金埅)[1706~1778]은 문과 급제 후 명릉별검, 예조정랑, 자인현감 등을 지낸 문신이다.

[가계]

김방의 본관은 예안(禮安)[선성(宣城)], 자는 거경(巨卿), 호는 쌍암(雙巖)이다. 아버지는 김홍렬(金弘烈), 어머니는 정언을 지낸 김창석(金昌錫)[1652~1720]의 딸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다. 할아버지는 생원 김가주(金可柱), 증조할아버지는 진사 김종호(金宗灝)이다. 김방의 첫째 부인은 통덕랑 안국준(安國駿)의 딸 순흥안씨(順興安氏)이고, 둘째 부인은 송최기(宋最基)의 딸 야성송씨(冶城宋氏)이다. 김방 가문은 서윤을 지낸 5대조 김우익(金友益)[1571~1639] 대부터 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우금(友琴)에 세거하게 되었다.

[활동 사항]

김방은 1729년(영조 5)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1738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급제하기에 앞서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정언섭(鄭彦燮)[1686~1748]이 참판으로 있으면서, 김방의 형편이 어려움을 알고 관직 자리를 주선해 주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742년(영조 18) 명릉별검에 제수되었다. 하루는 밤에 근무를 서는데 큰비가 내렸다. 이때 김방은 큰비로 말미암아 능의 담장이 무너지는 것을 알고 신속히 궁궐에 보고하였다. 명릉을 보수한 후, 영조는 김방의 근무 자세를 칭찬하며 식물(食物)을 내려주었다. 1754년(영조 30)에는 함경도도사에 제수되었지만, 81세였던 노모 봉양을 이유로 개차(改差)를 청원해 윤허 받았다. 1757년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노모 봉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영조가 계속 부르자 충주까지 올라갔다가 사직하는 상서를 올림과 동시에 단양 고을의 폐단을 아뢰었다.

김방은 1759년 자인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연신(筵臣)이 영조에게 아뢰어 노모 봉양과 가난한 집안 살림을 고려해 김방을 자인현감으로 추천하였다. 김방은 부임 직후 군교가 어민을 침해하던 폐단과 환곡의 폐단 등 고을의 잘못된 여러 관행을 혁파하였다. 재임 중 조정에서 『소학(小學)』 교육을 권장하였는데, 김방은 실효를 보기 위해 소학정(小學亭)을 짓고, 배필신(裵必新)을 훈장으로 삼아 어린 선비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때로는 직접 소학정에 가서 강독하니, 이웃 고을의 어린 선비들도 소학정을 찾아왔다고 한다. 1762년(영조 38) 큰 흉년이 들어 각종 부세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런데도 경상감영에서는 환곡을 독촉하였다. 김방은 경상감영의 지시에 따라 환곡을 납부하게 되면 고을 백성들이 먹고살기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해 환곡 납부를 미루었다.

[묘소]

김방의 묘소는 영주시 평은면 용혈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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