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10
한자 金奉祖
영어공식명칭 Kim Bong-jo
이칭/별칭 효백(孝伯),학호(鶴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2년연표보기 - 김봉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김봉조 태백산으로 피난
활동 시기/일시 1593년 - 김봉조 곽재우 휘하에서 의병활동
활동 시기/일시 1601년 - 김봉조 진사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김봉조 증광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4년 - 김봉조 성균관전적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15년 - 김봉조 사헌부감찰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16년 - 김봉조 단성현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18년 - 김봉조 낙향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김봉조 경상도도사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김봉조 익산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30년 - 김봉조 사헌부지평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30년연표보기 - 김봉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13년 - 김봉조 구호서원 제향
출생지 김봉조 출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거주|이주지 김봉조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봉조 거주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수학지 김봉조 수학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 지도보기
수학지 김봉조 수학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내죽리 152-8]지도보기
부임|활동지 김봉조 부임지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부임|활동지 김봉조 부임지 - 전라북도 익산시
묘소|단소 김봉조 묘소 -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묘소|단소 김봉조 묘소 -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마전리
사당|배향지 구호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풍산(豊山)
대표 관직 경상도도사|단성현감|사헌부지평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지역에 거주한 문신.

[개설]

김봉조(金奉祖)[1572~1630]는 문과 급제 후 경상도도사·단성현감·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가계]

김봉조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백(孝伯), 호는 학호(鶴湖)이다. 아버지는 산음현감을 지낸 김대현(金大賢)[1553~1602], 어머니는 충의위 이찬금(李纘金)의 딸 증 정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 할아버지는 장예원사의를 지낸 김농(金農)[1534~1591], 증조할아버지는 훈련원부정을 지낸 김의정(金義貞)[1495~1547]이다. 부인은 참봉을 지낸 김익(金翌)의 딸 숙인 광주김씨(光州金氏)이다.

김봉조는 아홉 형제 가운데 첫째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여덟째 김술조(金述祖)[1595~1611]를 제외하고, 김봉조·김영조(金榮祖)[1577~1648]·김창조(金昌祖)[1581~1637]·김경조(金慶祖)[1583~1645]·김연조(金延祖)[1585~1613]·김응조(金應祖)[1587~1667]·김염조(金念祖)[1589~1652]·김숭조(金崇祖)[1598~1632]가 모두 현달하였다. 여덟 명이 사마시에 급제하고, 다섯 명이 문과에 급제하였기에 인조는 이들 형제를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고 불렀다.

김봉조풍산김씨 가문은 안동부 풍산현 오릉동(五陵洞)[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세거지를 형성하였지만, 할아버지 김농이 영천군(榮川郡) 봉향리(奉香里)[지금의 영주시 휴천동]로 이주함에 따라 영주 지역과도 인연을 맺었다.

[활동 사항]

김봉조는 1572년(선조 5) 한양 장의동(藏義洞)[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에서 출생하였다. 6세 때 김상헌(金尙憲)[1570~1652]과 함께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1세 때 아버지를 따라 영천군 봉향리로 돌아왔으며, 12세 때 권두문(權斗文)[1534~1617]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7세 때 이산서원(伊山書院)[영주시 이산면 내림리]에서 공부하였으며, 18세 때에는 곽진(郭𡺽)[1568~1633]과 소수서원(紹修書院)[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서 공부를 하였다. 또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김봉조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모시고 태백산으로 피난 갔으나, 1593년 아버지의 명으로 곽재우(郭再祐)[1552~1617] 휘하로 들어가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598년 스승 류성룡이 정적들로부터 주화오국(主和誤國)의 혐의로 탄핵을 당하자, 상소문을 올려 변무하려 했으나 아버지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1535~1623]이 문묘에 배향된 이언적(李彦迪)[1491~1553]과 이황(李滉)[1501~1570]을 배척하자, 여러 선비를 이끌고 다섯 차례에 걸쳐 정인홍을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1613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바로 사도시직장에 제수되었다. 1614년 정경세(鄭經世)[1563~1633] 등과 더불어 류성룡을 제향하는 병산서원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616년 단성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중 통영에 글을 올려 단성현 나장(羅將)들의 폐단을 보고하였다. 단성현감으로 있으면서 관아의 재물을 빌려다 쓴 어떤 사람을 심문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사람이 정인홍 문하에 출입하던 자였다. 이 일로 정인홍과 갈등이 발생하였고, 김봉조는 1618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한동안 병산서원에서 류성룡의 문집을 교정하는 등 학문 활동에 전념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자 경상도도사에 제수되었다. 이때 일본 사신의 접위관이 되어 일본 정세에 대한 장계를 올렸다. 1624년 익산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중 구천여 석에 이르던 포적(逋糴) 견감을 청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후 예조정랑·성균관직강을 거쳐, 1630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다.

[학문과 저술]

김봉조의 문집으로 4권 2책의 『학호집(鶴湖集)』이 전한다.

[묘소]

김봉조의 묘소는 처음에는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광석산(廣石山)[대지산(大枝山)]에 마련되었으나, 1822년(순조 22) 예천군 지보면 마전리로 이장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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