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41
한자 成彦楫
영어공식명칭 Seong Eon-jip
이칭/별칭 용여(用汝),남애(南厓)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32년연표보기 - 성언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62년 - 성언집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68년 - 성언집 정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71년 - 성언집 봉상시직장 겸 승문원저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72년 - 성언집 예조좌랑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78년 - 성언집 결성현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91년 - 성언집 전적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92년 - 성언집 강진현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793년 - 성언집 공주 유배
활동 시기/일시 1794년 - 성언집 해배
활동 시기/일시 1811년 - 성언집 통정대부 가자
몰년 시기/일시 1812년연표보기 - 성언집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00년 - 성언집 가선대부 내부협판 추증
출생지 성언집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성언집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지도보기
부임|활동지 성언집 부임지 -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부임|활동지 성언집 부임지 - 전라남도 강진군
유배|이배지 성언집 유배지 - 충청남도 공주시
묘소|단소 성언집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창녕(昌寧)
대표 관직 결성현감|성균관전적|강진현감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문신.

[개설]

성언집(成彦楫)[1732~1812]은 과거 급제 후 관직에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향촌에서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주력하였다.

[가계]

성언집의 자는 용여(用汝), 호는 남애(南厓),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성세벽(成世璧), 할아버지는 성희인(成喜寅), 아버지는 성찬(成澯)인데, 모두 사환에 뜻을 두지 않고 재야에 은거하였다. 어머니는 장위삼(張緯三)의 딸 옥산장씨(玉山張氏)이며, 부인은 황응서(黃應緖)의 딸 창원황씨(昌原黃氏)이다.

[활동 사항]

성언집은 1732년(영조 8)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동포리[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에서 출생하였다. 1762년(영조 38)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에 들었다. 1768년에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으나 숙배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1771년(영조 47) 봉상시직장 겸 승문원저작으로 재임하다가 부모 봉양을 위해 사직하였다. 1772년에는 성균관전적·예조좌랑·가통례를 지냈다.

성언집은 1778년(정조 2) 결성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나, 1779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여 돌아왔다. 1791년(정조 15) 성균관전적으로 복직하였으며, 1792년 지평에 제수되었지만,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사도세자의 신원을 요청하는 영남 유생들의 유소 즉, 만인소(萬人疏)의 소수(疏首)로 추천되었지만 이우(李㙖)[1739~1811]에게 양보하였다. 1792년 강진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1793년 7월 곡식 진대 때 보고 하지 않았다는 전라도어사의 장계로 공주에 유배되었다. 1794년 해배되었으며, 곧 정언에 제수되었지만, 승정원에서 서용을 반대하여 교체되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희백당(希白堂)을 짓고 소요하였다. 1811년(순조 11) 1월에 통정대부에 가자되었고, 호군에 올랐다.

[학문과 저술]

성언집의 유고로 『남애일고(南厓逸稿)』 2권 1책이 전한다.

[묘소]

성언집의 묘소는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성언집은 1900년(광무 4)에 가선대부 내부협판(內部協辦)에 추증되었다. 이인행(李仁行)[1758~1833]이 행장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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