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92
한자 鄭從韶
영어공식명칭 Jeong Jong-so
이칭/별칭 가정(可貞),정헌(靖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47년 - 정종소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47년 - 정종소 중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59년 - 정종소 사헌부좌헌납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60년 - 정종소 성균관사예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62년 - 정종소 한성소윤 겸 사헌부장령 제수
활동 시기/일시 1469년 - 정종소 봉상시부정 재임
출생지 정종소 출생지 -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
부임|활동지 정종소 부임지 - 경상북도 영주시
묘소|단소 정종소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
사당|배향지 숙모전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동학사1로 462[학봉리 789]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영일(迎日)
대표 관직 성균관사성|영천군수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지역에 지방관으로 부임한 문신.

[개설]

정종소(鄭從韶)[?~?]는 성종 연간 영천군수(榮川郡守)를 역임했던 문신으로 영주 지역 교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가계]

정종소의 자는 가정(可貞), 호는 정헌(靖軒),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아버지는 정문예(鄭文裔)이다.

[활동 사항]

정종소는 1447년(세종 29) 봄 문과 발영시에 급제하여 성균관학록이 되었으며, 1447년 가을에는 문과 중시에 급제하였다. 이어 성균관과 집현전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부모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해서, 의성현령으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 소식을 듣고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후에 조정에서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가 만년에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권유로 영천군수로 부임하였다.

영천군수 재임 중 정종소는 향서당(鄕序堂)·소루(小樓)·서정자(西亭子)·남정자(南亭子)를 세웠다. 김종직이 일찍이 소루의 기문을 썼는데, “이 고을의 어진 군수로서 뛰어나게 나타났던 인물 중 군민들이나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있는 분들로는 호정(浩亭) 하륜(河崙), 정습인(鄭習仁), 최원유(崔元濡) 3인이 있었고, 현재의 군수 오천정공(烏川鄭公)도 이와 동등한 부류의 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1460년(세조 6) 무렵 군수 정종소가 사신을 마중하고 배웅하기 위하여 세운 정자인 영훈정(迎薰亭)이 1643년(인조 21) 군수 신속(申洬)[1600~1661]에 의해 중건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정종소는 영천군수를 마친 후에 예천군수·안동진관병마첨절사·함양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입조하여 봉상시부정으로 경연에 나가서, 성종에게 경사를 강하였고 전라도진휼사로 임명되었다. 관직은 성균관사성까지 지냈다.

[학문과 저술]

정종소의 시문집으로 2권의 『오천금석록(烏川金石錄)』이 전한다.

[묘소]

정종소의 묘소는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정종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소재한 숙모전(肅慕殿)[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7호]에 제향되어 있다. 정종소의 묘소 아래에는 묘재(墓齋)인 원당재(元堂齋)가 남아 있다. 9세손 정중기(鄭重器)[1685~1757]가 묘지문을 지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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