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693
한자 錦城大君
영어공식명칭 Prince Geumseong
이칭/별칭 정민공(貞愍公),이유(李瑜)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26년연표보기 - 금성대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33년 - 금성대군 책봉
혼인 시기/일시 1437년 - 금성대군 혼인
활동 시기/일시 1455년 - 금성대군 삭녕 유배
활동 시기/일시 1455년 - 금성대군 광주 이배
활동 시기/일시 1456년 - 금성대군 순흥 이배
활동 시기/일시 1457년 - 금성대군 단종 복위 모의
몰년 시기/일시 1457년연표보기 - 금성대군 사사
추모 시기/일시 1711년 - 금성단 설립
추모 시기/일시 1739년 - 금성대군 ‘정민’ 증시
출생지 경복궁 -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외가|처가 금성대군 처가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묘소|단소 영주 금성대군 신단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2767번길 5[내죽리 72]지도보기
성격 왕자
성별
본관 전주(全州)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지역에 유배 온 왕자.

[개설]

금성대군(錦城大君)[1426~1457]은 세종의 아들로 둘째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후 순흥도호부로 유배되었다. 1457년(세조 3) 단종복위운동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유배지에서 처형당했고, 순흥도호부는 해체되었다.

[가계]

금성대군의 본관은 전주(全州), 휘는 유(瑜),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아버지는 세종,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 할아버지는 태종, 증조할아버지는 태조이다. 8남 2녀 중 6남으로 위로는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임영대군·광평대군이 있으며, 아래로는 평원대군·영응대군이 있다. 1437년(세종 9) 참찬 최사강(崔士康)[1385~1443]의 딸 전주최씨와 혼인하였다.

[활동 사항]

이유(李瑜)는 1433년(세종 15) 1월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7년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이방번(李芳蕃)[1381~1398]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1452년(단종 즉위년)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 이유(李瑈)[1417~1468]와 함께 보필을 약속하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황보인 등을 제거하자, 이에 반대하여 단종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1455년 우의정 한확(韓確)[1400~1456] 등이 금성대군과 한남군 이어(李𤥽)[1429~1459], 영풍군 이전(李瑔)[1434~1457], 영양위 정종(鄭悰)[?~1461, 문종 사위] 등이 결탁하여 난을 모의한다고 고발하여, 삭녕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1418~1456] 등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단종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으며, 금성대군도 순흥으로 이배되었다.

금성대군은 유배지에서 순흥도호부사 이보흠(李甫欽)[?~1457]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고, 도내 사족들에게 격문을 돌려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거사 전인 6월 말 관노 이동(李同)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세조는 순흥에 소윤 윤자(尹慈), 예천에 우보덕 김지경(金之慶)[1419~1485], 안동에 진무 권감(權瑊)[1423~1487]을 각각 보내어 연루된 자들은 국문하도록 했다. 또 환관 지덕수(池德壽)·안충언(安忠彦)에게 명하여 순흥에 가서 금성대군금성대군의 처자들을 거느리고 오게 하였다.

한편 『세조실록』을 보면, 1457년 7월 3일 순흥부사 이보흠이 치계하여 이유의 역모 사실을 알리고 있다. 이보흠금성대군이 향리 정중재와 내통하여 음모를 꾸미고, 자신이 예방할 때 진귀한 보물과 옷가지를 선물로 주며 자신을 위협하여 모반을 부추겼다고 한다. 이에 대사헌 김순에게 이보흠과 향리 정중재를 국문토록 하고, 금성대군은 잘 타일러서 고신과 족쇄 없이 안동에 안치하였다. 또한, 금성대군의 역모에 연루된 자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올리고, 윤자와 권감이 역모에 연루된 자들을 압송하도록 했다. 이어 대사헌 김순은 이보흠과 함께 상경하도록 조치했다.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순흥도호부는 혁파되어 인근 영천군풍기군에 분속되었다. 1457년 9월 10일 사간원에서 금성대군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였고, 신숙주·정인지 등은 노산군도 함께 사사하기를 요청하였다. 1457년 10월에는 승정원·사헌부·의정부·육조·충훈부뿐만 아니라 임영대군·양녕대군·효령대군 등도 노산군금성대군의 처벌을 요청하였다. 이에 세조는 1457년 10월 21일 금성대군을 사사하였으며, 이후 『종친록』과 『유부록(附錄錄)』에서 노산군·금성대군과 그 자손들을 삭적하고, 종친으로서 지위를 박탈하였다.

[상훈과 추모]

1719년(숙종 45) 순흥도호부사 이명희(李命熙)의 청원으로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금성대군을 추모하기 위한 영주 금성대군 신단(榮州錦城大君神壇)[사적 제491호]이 세워졌다.

1739년(영조 15) 금성대군에게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에 육종영(六宗英)[신주배향(神主配享)을 내린 안평대군 등 6인의 종친]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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