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조현의 처 반남박씨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18
한자 閔祚顯-妻潘南朴氏
영어공식명칭 Bannam Park Clan of Min Jo-hyen's Wife
이칭/별칭 열부 반남박씨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순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96년연표보기 - 민조현의 처 반남박씨 출생
추모 시기/일시 1823년 - 민조현의 처 반남박씨 정려각 건립
사당|배향지 선비촌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지도보기
성격 열부
성별
본관 반남(潘南)

[정의]

조선 후기 영주 출신의 열부.

[개설]

민조현(閔祚顯)의 처 반남박씨(潘南朴氏)[1796~?]는 죽음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켰던 열부이다. 영주 선비촌에 박씨 부인의 열부각(烈婦閣)이 세워져 있다.

[가계]

민조현의 처 반남박씨는 사간원대사간을 역임한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1517~1586]의 후손으로 박사건(朴師騫)[1796~1820]의 딸이다.

[활동 사항]

반남박씨는 1812년(순조 12) 17세에 민봉조(閔鳳朝)의 아들 민조현과 혼례를 올렸다. 혼례를 치르기 전부터 민조현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결국 두 달 만에 세상을 뜨고 만다. 박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며 살았다. 박씨의 행실에 감동한 시백부 민봉래(閔鳳來)는 자신의 장자 민정현(閔鼎顯)의 아들 민팽령(閔彭齡)을 박씨의 양자로 입적해 주었다.

홀로 된 지 9년째 되던 어느 날 이웃에 살고 있던 김조술이란 자가 박씨에게 흑심을 품었고, 뜻대로 되지 않자 그 반감으로 엄청난 모함을 하게 된다. 박씨가 아이를 세 번이나 지우고 또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을 낸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정절임을 감안하면 박씨에게 이 소문은 엄청난 치욕이었다.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관아에 달려가 울며 호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억움함을 호소할 길이 없자 ‘내가 죽어서라도 원통한 귀신이 되지 않게 해 다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하고 말았다.

민조현의 처 반남박씨 사후 시댁과 친가에서는 열부 박씨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해 관아에 항의하고 호소하였다. 그런데도 관아에서는 오히려 가족들에게 “약을 먹여 죽였다”, “관문을 부수고 관정을 모욕했다”라는 등으로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였다. 박씨의 노비였던 낭이와 그 아들 만석에게까지 “박씨에게 약을 먹였다”라는 자백을 받아내고자 가혹한 매질을 하며 협박하였다. 하지만 끝까지 낭이와 만석은 박씨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관아의 어처구니없는 행태는 인근 지역으로 퍼져서 갔고, 각지 향교와 유생들까지 나서 향회 및 도회를 통해 열부 박씨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한 진정서를 올리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1822년(순조 22) 박씨의 가족과 지역 사림들의 노력은 조정에 있는 여러 대신의 마음을 움직였고, 암행어사 김정균(金鼎均)에 의해 사건의 전말이 모두 밝혀지게 되었고, 억울함도 풀 수 있었다.

[상훈과 추모]

1822년 민조현의 처 반남박씨의 억울한 사건이 풀린 뒤 이어 민조현의 처 반남박씨에게 열행(烈行) 표창과 정려(旌閭)를 세우라는 명이 내려져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만방리 마을 앞 큰길가에 정려를 세우게 되었다. 일포(逸圃) 박시원(朴時源)이 상량문을 짓고,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1768~1844]이 정판을 준비했다. 1823년 5월 가족과 도내 많은 사림이 모여 정판을 걸었다. 2년 후 김조술은 참형 되었고, 도내 유림이 모여 열부 박씨를 장사지냈다. 장례 때 여러 고을 수령과 사대부 문중들이 부의(賻儀)와 만장(輓章)을 보내며 문상하였다.

박씨 부인의 행적을 엮은 『열행실기(烈行實記)』 3책이 전한다. 문수면 만방리 마을 앞 국도변에 열부 박씨 부인의 열부각과 노비 만석의 충복각(忠僕閣)이 함께 있었으나 국도 확장으로 인해 2002년 선비촌으로 이건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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