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봉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27
한자 申鳳均
영어공식명칭 Sin Bong-gyun
이칭/별칭 학암(鶴庵)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6년연표보기 - 신봉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신봉균 창의
몰년 시기/일시 1907년연표보기 - 신봉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신봉균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신봉균 출생지 - 경상북도 예천군 효자면 고항리
거주|이주지 신봉균 거주지 - 경상북도 예천군 효자면 고항리
활동지 신봉균 활동지 - 경상북도 일원
성격 의병
성별

[정의]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개설]

신봉균(申鳳均)[1866~1907]은 1895년 경상도 풍기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80여 명의 군사와 함께 주흘산(主屹山)에서 적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후기의병 시기인 1907년 10월 유인석(柳麟錫)[1842~1915] 의병장의 행방을 추궁하는 일본군에 항거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가계]

신봉균의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학암(鶴庵)이다. 1866년 1월 7일 경상도 풍기군 상리면 고항동[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효자면 고항리]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신봉균은 1895년 11월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과 일제와 개화 내각에 의해 단행된 단발령의 강행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향리인 풍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신봉균은 모집된 군사 80여 명을 이끌고 충청도 단양의 적성을 출발하여 주흘관으로 들어가 그 아래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이날 관군의 공격을 받고 항전을 펼쳤으나 패하고 백운동(白雲洞) 송림으로 퇴각하였다. 하지만 야간에 다시 관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병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자신도 다치고 말았다. 신봉균은 홀로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에 있는 초암사(草菴寺)에 들어가 요양을 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의병항쟁이 다시 일어났다. 이렇게 일어난 의병항쟁은 1907년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 되고, 한국군대가 강제 해산당하면서 의병전쟁으로 확대되어 갔다. 신봉균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중, 1907년 10월 일본군에게 잡혀가 유인석(柳麟錫)[1842~1915] 의병장의 행방을 밝히라고 추궁하는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신봉균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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