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32
한자 李敎永
영어공식명칭 Lee Gyo-yeong
이칭/별칭 이경영(李敬永),이교철(李敎哲),이춘삼(李春三),이무산(李茂山),이용담(李龍潭)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3년연표보기 - 이교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이교영 김상한 부대 좌익장 임명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이교영 이명상 부대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9년 - 이교영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10년 - 이교영 교수형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11년연표보기 - 이교영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이교영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거주|이주지 이교영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노곡리 지도보기
활동지 이교영 활동지 -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 일원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김상한 부대 좌익장

[정의]

개항기 영주 출신의 의병.

[개설]

이교영(李敎永)[1873~1911]은 1907년 문경 지역 김상한(金商翰)[1842~1917] 부대의 좌익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에는 소모장 이명상(李明相)[?~1909] 휘하에서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 등지에서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이교영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노곡리에서 살았다. 의병활동을 전개하는 동안 이경영(李敬永)·이교철(李敎哲)·이춘삼(李春三)·이무산(李茂山)·이용담(李龍潭) 등 여러 이름을 사용하였다.

[활동 사항]

이교영은 1907년 문경의 김상한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 김상한은 이강년 부대의 별진장이었으나 이강년이 문경에서 경기도 지역으로 이동하자 독립한 뒤 1907년 3월부터 11월까지 문경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이교영은 ‘이춘삼’이란 이름으로 좌익장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11월 김상한 부대의 소모장이었던 단양의 의병장 이명상이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독립하자, 이교영도 이명상을 따라 활동하였다. 이교영은 1909년 체포될 때까지 300여 명의 군사를 데리고, 강원도 영월, 충청북도 영춘·단양, 경상북도 영천·풍기·순흥·예천·상주 등 여러 곳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3월부터 10월에 이르기까지 순흥군 봉양면 소천리, 풍기군 외면 신항리·고교리 등지에서 일본군 및 순사대의 공동 토벌대와 교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교영은 안동군 풍산면, 영천군(榮川郡) 금광석리 등에서 군자금을 징수하고, 예천군 미울리에서는 일본군의 밀정 노릇을 하던 일진회원 홍갈산(洪葛山) 등 2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안동군 하암탑리에서도 의병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한 한 청년을 처단하는 등의 투쟁을 펼쳤다.

1909년 11월 18일 제천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910년 1월 27일 경성공소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상고하였으나 1910년 2월 2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고 원심형 확정으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교영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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