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41
한자 南斗熙
영어공식명칭 Nam Du-hui
이칭/별칭 극중(極中),남두희(南斗凞)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0년연표보기 - 남두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남두희 청송의진 우익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남두희 순흥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24년연표보기 - 남두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7년연표보기 - 남두희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남두희 출생지 -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거성리
거주|이주지 남두희 이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지도보기
묘소 남두희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청송의진 우익장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지역에 정착한 의병.

[개설]

남두희(南斗熙)[1850~1924]는 1896년 청송의진(靑松義陣)의 우익장으로 활약하였다.

[가계]

남두희의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극중(極中), 이명으로 남두희(南斗凞)를 사용하였다. 1850년 1월 29일 지금의 청송군 현동면 거성리에서 남태치(南泰雉)와 선산김씨(善山金氏)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남두희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로 이주하였다.

[활동 사항]

남두희는 1896년 3월 16일 창의한 청송의진에 참여하였다. 이에 앞서 1896년 3월 8일 안동의진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1873~1914]이 청송 관아의 군기 탈취를 시도했고, 창의를 촉구하는 격문을 청송 유림에게 보냈는데, 이에 고무된 청송 유림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창의를 추진하였다. 남두희는 1896년 3월 12일 청송 유림 200여 명과 함께 향회를 개최하였고, 이날 오후 객사에서 창의장으로 심성지(沈誠之)[1831~1904]를 추대하였다. 그리고 3월 16일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창의하였다. 3월 17일 의병들은 축문과 창서사(唱誓辭)를 낭독하며 천신과 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1896년 3월 22일 남두익은 청송의진 우익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남두익은 서기 남상현(南相鉉)[1861~1942], 사병도총 남승철(南昇喆)[1851~1922], 향원 남구석(南龜錫)[1812~1899] 등 청송군 현동면의 도평·월매·개일 등지에 세거하고 있던 영양남씨 일족과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청송의진 해산 이후 남두희는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으로 이주하였고, 1912년 2월에는 순흥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24년 12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묘소]

남두희의 묘소는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남두희는 1997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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