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47
한자 權錫煥
영어공식명칭 Gwon Seok-hwan
이칭/별칭 권봉상(權鳳象)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7년 8월 14일연표보기 - 권석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9년 3월 9일 - 권석환 영주농민조합 쟁의부장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29년 4월 15일 - 권석환 영주청년동맹 풍기지부 조사연구부장 선임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30년 - 권석환 영주 1차 격문 투쟁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71년 9월 6일연표보기 - 권석환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권석환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권석환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백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권석환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백리 지도보기
활동지 권석환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영주농민조합 쟁의부장|영주청년동맹 풍기지부 조사연구부장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권석환(權錫煥)[1907~1971]은 영주농민조합영주청년동맹에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 영주 1차 격문 투쟁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가계]

권석환은 1907년 8월 14일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백리에서 출생하였다. 권봉상(權鳳象)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활동 사항]

1929년 3월 9일 제3회 풍기농우동맹 정기대회에서 풍기농우동맹이 해산되고 영주농민조합이 창립되었는데, 이때 권석환이 쟁의부장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4월 15일 개최된 영주청년동맹 집행위원회에서는 풍기지부의 조사연구부장에 선임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은 권석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영주에서는 수차례 격문 투쟁이 펼쳐졌다. 이미 영주청년동맹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이 발생한 직후인 1929년 11월 13일 제6회 집행위원회를 열고 ‘광주학생충돌사건’을 조사하기로 한 바 있다. 또한, 신간회 영주지회의 많은 회원이 영주 격문 투쟁에 연루되어 경찰 조사를 받거나 재판을 받아 투옥되었다. 이런 관계로 신간회 영주지회는 1929년에 신간회 본부가 전국의 138개 지회를 대상으로 다섯 등급으로 구분했을 때 1등 지회로 선정될 수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권석환은 영주 1차 격문 투쟁을 주도하였다. 영주 1차 격문 투쟁에서 살포된 격문은 1930년 1월 31일 권석환을 포함한 안기석(安基錫)[1897~1968]·김준상(金俊相)[1910~?]·윤차경(尹次慶) 등이 작성하였다. 격문은 「학생제군에게」와 「전조선적 학생 대검거와 조선총독 폭압정치 및 야만적 경찰의 압박에 전조선 피압박계급 대중은 일제히 분기하자」라는 제목으로 작성되었는데, 두 종류의 격문은 당시 서울에서 살포된 제목과 일치했다. 권석환이 참여한 영주 1차 격문은 학생과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두 종류로 작성되었다. 1930년 2월 2일 권석환은 윤차경과 함께 두 종류의 격문을 영주공립보통학교 등에 살포하기로 하고, 격문 300매 중 77매를 그날 밤 영주공립보통학교 제2교사에 들어가 3학년과 6학년생 교실함 속에 전부 살포했다.

권석환은 1929년 11월에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일제에 대한 항쟁이 폭발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 이에 격문을 통해 영주 사람들도 “잠에서 깨어나 운동장에서, 시장에서 조선민족해방만세를 외쳐라” 하며 투쟁을 촉구하였다. 또한, 일제 침략에 대한 부당성과 그에 따른 조선 민중의 몰락을 지적하며, 일제에 대한 투쟁을 촉구하였다.

영주 1차 격문 투쟁은 1930년 2월 4일부터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몰고 왔다. 영주청년동맹원을 비롯해 신간회 영주지회, 영주농민조합의 회원에 이르기까지 수십 명이 검거되었다. 1930년 2월 8일에서 9일에 걸쳐 이틀 동안 권석환을 포함해 윤차경·김준상·정효동(鄭效東)·황윤경(黃潤慶)·안기석 등 6명이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가택침입 등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안동검사분국으로 송치되었다. 며칠간 취조를 마치고 1930년 2월 15일에서 16일 무렵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권석환을 비롯한 영주 출신들은 예심에 회부되었고, 봉화청년동맹의 황윤경만 1930년 2월 19일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권석환은 1930년 3월 13일 대구로 압송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0년 5월 30일 최종 취조가 끝나고, 6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1930년 7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주거침입 혐의로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하였다. 권석환은 미결기간을 포함해 1년 1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권석환은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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