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63
한자 朴齊璿
영어공식명칭 Park Je-seon
이칭/별칭 박학제(朴學齊),박선옥(朴旋玉),박엽(璞曄)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8년연표보기 - 박제선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8년 - 박제선 한성사범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박제선 한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 본과훈도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박제선 영천공립보통학교 훈도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박제선 풍기공립보통학교 훈도 역임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8년 - 박제선 대동상점사건으로 처벌
몰년 시기/일시 1938년연표보기 - 박제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박제선 건국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박제선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박제선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70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박제선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70
학교|수학지 한성사범학교 - 서울특별시
활동지 박제선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제선(朴齊璿)[1878~1938]은 1915년 대한광복회의 상업 조직인 대동상점(大同商店)을 설립하여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베이징[北京]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박제선의 본관은 반남(潘南), 이명은 박학제(朴學齊) 혹은 박선옥(朴旋玉), 별명은 박엽(璞曄)이다. 아버지는 박예수(朴禮壽), 어머니 김분례(金粉禮)이며, 1878년 7월 13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들인 박진양(朴震陽)[혹은 박진양(朴鎭陽), 1909~1940]과 박태양(朴泰陽)[1914~1965]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활동 사항]

박제선은 1908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08년 3월 30일 한성사범학교부속보통학교 본과훈도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08년 6월 일본 유학을 위해 사직을 학부에 청원하였으며, 1908년 12월 25일 대한협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당시 한성사범학교 훈도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강제 병합의 불가함을 주장하다가 경찰의 취조를 받았다. 그 후 일제의 감시를 받다가 1913년 영천공립보통학교 훈도, 1917년 풍기공립보통학교 훈도로 근무하였다.

박제선은 1915년 9월 11일 이교덕(李敎悳)[1895~1955]·류명수(柳明秀)[1893~1926]·권영목(權寧睦)[1884~1935]·정응봉(鄭應鳳)[1895~1947] 등 교원 및 부호들과 함께 영주시장에 잡화상 대동상점을 설립하였다. 대동상점은 대한광복회의 총사령 박상진(朴尙鎭)[1884~1921] 등이 만주지방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개설한 전국 100곳의 상업 조직 중 하나였다. 박제선영천공립보통학교 훈도로 근무하면서 봉화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있던 처남 류명수, 풍기에서 서당을 운영하고 있던 정응봉, 영주 지역의 부호 자제였던 제자 권영목·이교덕 등과 함께 대동상점 설립에 참여하였다. 자본금 대부분은 이교덕이 출자하였으며, 권영목은 토지 80두락, 류명수는 토지 70두락을 대여하는 형식으로 투자하였다. 표면상으로는 권영목이 경영을 맡았으나, 실제로는 박제선이 주재하였다.

박제선은 1917년 8월부터 류명수·김노경(金魯卿)·권영목 등과 함께 만주 이주를 준비하였다. 1917년 8월 이주지 선정을 위해 만주지방을 시찰한 뒤, 1918년 3월경부터 만주 봉천(奉天)으로 이거할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울의 매동공립보통학교 훈도 김노경이 참여하였다. 1917년 12월 26일 서울 남문여관에서 대한광복회의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한 류명수·권영목·김노경·조재하 등이 협의한 결과, 권영목을 만주로 보내 장래 있을 만주 이주를 준비시키고, 길림독군(吉林督軍) 맹사원(孟思遠)의 허락을 얻어 군사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주와 교육을 위한 자금은 대동상점을 처분하여 활용하기로 하였다. 권영목은 만주로 출발하기에 앞서 이교덕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이때 박제선권영목의 지시에 따라 대동상점 금고에 보관되어 있던 현금 700원을 빼내 1918년 1월 10일 권영목과 함께 만주 길림(吉林)으로 갔다.

박제선은 1918년 3월 영주 주재 일본헌병대에 권영목이 체포되면서 관련자들도 함께 체포되었다. 이른바 대동상점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이다. 이에 박제선은 1918년 5월 3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공소를 신청하여 1918년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금고 6월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이교덕·권영목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38년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박제선은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