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68
한자 宋在祜
영어공식명칭 Song Jae-h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송재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송재호 제2차 유림단의거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송재호 신간회 영주지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송재호 신간회 영주지회 임시대회 집행위원 후보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송재호 영주청년동맹 집행위원 선출
몰년 시기/일시 1974년연표보기 - 송재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송재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송재호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919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송재호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919
학교|수학지 북경학원 - 중국 베이징
활동지 송재호 활동지 - 경상북도 영주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영주청년동맹 집행위원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송재호(宋在祜)[1906~1974]는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 때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이후 신간회 영주지회영주청년동맹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송재호의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1906년 10월 12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에서 아버지 송인상(宋仁相)과 어머니 류하회(柳河回)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송영호(宋永祜)[1903~1968]도 송재호와 함께 제2차 유림단의거에 참여하였다.

[활동 사항]

송재호는 1924년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서 북경학원 중등과에 입학하였고, 1925년 6월에 졸업하였다. 1925년 4월 무렵 송재호는 졸업을 앞두고, 베이징 서성(西城)에서 김창숙(金昌淑)[1879~1962]·김화식(金華植)[1902~1950]·이봉로(李鳳魯)[1901~1940]·권상수(權相洙)[1873~1941] 등 영남 출신의 인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의 뜻을 같이하고, 김창숙이 주도한 제2차 유림단의거에 가담하였다. 1925년 6월 20일 베이징에서 국내로 잠입한 송재호는 김창숙에게 군자금 600원을 송금하였다. 1925년 9월 25일경 김창숙이 국내로 잠입하자, 군자금 모집에 필요한 활동 비용 일체를 자신이 부담하기로 약속하고, 토지 매각 자금 1,700원을 제공해 주었다. 또 형 송영호로부터 군자금 모집 계획을 듣고, 자신 소유의 논 2,185평을 매각한 현금 600원을 김창숙에게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송재호는 1926년 4월 15일 열차를 타고 서울에서 영주로 돌아오던 도중 상주역에서 일본 경찰에게 형 송영호로 오인당하고 상주경찰서로 연행되었다. 형 송영호는 예천에서 자동차로 갈아타고 영주에 도착하였지만, 1926년 4월 17일 자택에서 체포되었다. 상주에서 체포된 송재호는 상주경찰서와 영주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본가로 돌아와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1926년 2월 말경 임신 중이던 부인 유임이도 권총을 들고 집에 들이닥친 일본 경찰의 난폭한 수사 때문에 3월 3일 임신 9개월의 태아를 조산하고, 3월 6일 사망한 상황이었다.

송재호는 1928년 8월 결성된 신간회 영주지회에 참가하였으며, 1929년 7월 30일 임시대회에서 집행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29년 4월 15일에는 영주청년동맹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9년 4월 26일과 1930년 3월 7일 두 차례에 걸쳐 일본 경찰에게 피체되었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송재호는 1931년 국내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탈출,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봉천성(奉天省) 안동(安東)에서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2개월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그 후 서울 팔판동(八判洞)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상훈과 추모]

송재호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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