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793
한자 朴啓陽
영어공식명칭 Park Gye-ya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8년연표보기 - 박계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박계양 군자금 징수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박계양 「혁신공보」 작성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박계양 징역 2년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박계양 징역 1년 감형 및 투옥
몰년 시기/일시 1937년연표보기 - 박계양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9년연표보기 - 박계양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박계양 출생지 - 경상북도 영주시 고현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박계양 거주지 - 경상북도 영주시 고현동 지도보기
활동지 박계양 활동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
활동지 박계양 활동지 -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율수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계양(朴啓陽)[1888~1937]은 1919년 봉화군 봉성면에서 독립군 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혁신공보(革新公報)」라는 제목의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려다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가계]

박계양은 지금 영주시 고현동에서 출생하였다.

[활동 사항]

박계양은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품었으며, 민족의 독립을 갈구하였다. 박계양은 마침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정응봉(鄭應鳳)[일명 정의극(鄭義極), 1895~1947]·곽덕규(郭德奎) 등과 함께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하여,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징수하기로 계획하였다.

정응봉과 곽덕규는 1919년 9월 24일[음력 8월 1일] 오전 11시경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의 자산가 박규영(朴奎永)의 집에 들어가 독립군 자금을 위한 출자를 요구하였으나 돈이 없자 국가를 위해 자금을 준비해 두라고 경고한 뒤 문을 나섰다. 이들은 1919년 9월 24일 그 마을의 박용하(朴龍河) 집에 가서 군자금을 요청하였으나, 역시 돈이 없자 준비를 해 두면 다시 오겠다고 말한 뒤 돌아갔다. 그 뒤 한두 차례 다른 사람을 보내 출금을 촉구하던 중 1919년 11월 15일 박계양정응봉이 체포되면서 중단되었다.

이와 별도로 박계양은 한국이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이 되게 하려는 계획으로 정응봉·류종렬(柳宗烈)과 셋이서 문경군 농암면 율수리 신철균(申喆均)의 집에서 「혁신공보」라는 격문을 작성했다. 한국의 독립과 서울의 독립운동 청년단의 활동 및 독립군 자금을 위한 부호들의 협조 등과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격문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각 면사무소에 우송하거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배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15일 순찰 중이던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문서는 배포해 보지도 못한 채 체포되고 말았다.

박계양은 1920년 1월 2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대정 8년[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1920년 2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박계양은 2009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김희곤 외, 『경북독립운동사』4-국외지역 항일투쟁(경상북도, 2014)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1920. 1. 23.)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20.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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