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970
한자 喜方寺
영어공식명칭 Huibangsa Temple
이칭/별칭 지질방사(池叱方寺)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기관 단체/사찰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죽령로1720번길 278[수철리 313-3]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박병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861년 - 희방사 창건
건립 시기/일시 863년연표보기 - 지질방사 창건
개칭 시기/일시 1690년연표보기 - 지질방사에서 희방사로 개칭
중수|중창 시기/일시 1690년 - 희방사 중창
중수|중창 시기/일시 1957년 - 희방사 중창
개칭 시기/일시 1986년 - 희방사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종단 변경
중수|중창 시기/일시 1986년 - 희방사 중창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18년 - 희방사 『훈민정음』 해례본 목판 목간본 봉안
최초 건립지 희방사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죽령로1720번길 278[수철리 313-3]
현 소재지 희방사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죽령로1720번길 278[수철리 313-3]지도보기
성격 사찰
창건자 두운
전화 054-636-2400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

[개설]

희방사(喜方寺)는 643년(선덕여왕 12)에 창건되었다. 소백산 연화봉 남쪽에 위치한 희방계곡 좌우로 부속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희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건립 경위 및 변천]

희방사의 창건 시기는 자료마다 상이하다. 『희방사유지(喜方寺遺誌)』에는 643년(선덕여왕 12)에 두운(杜雲)희방사를 창건했다고 하나, 두운이 활동한 시기는 8세기이며, 현존하는 유물이나 유적에서 7세기경 창건을 뒷받침할 만한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 반면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에는 861년 두운이 창건했다고 하는데, 대체로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고 있다.

희방사에는 두운과 관련된 창건 설화가 전한다. 두운이 이곳 동굴에서 기도하던 중 호랑이 목에 박힌 비녀를 뽑아 살려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그 호랑이가 의식을 잃은 처녀를 업고 오자, 두운이 정성껏 간호하고 원기를 회복시킨 다음 사연을 물으니, 그녀는 계림호장(鷄林戶長) 유석(兪碩)의 무남독녀로서, 그날 혼인을 치르고 신방에 들려고 하는데 별안간 불이 번쩍하더니 몸이 공중에 떴고, 그 뒤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이에 계림호장이 딸을 살려준 은공에 보답하고자 절을 지어 희방사라 했다는 내용이다.

『한국사찰전서』에 의하면 희방사는 861년(경문왕 1)에 두운대사가 창건하고, 863년(경문왕 3)에 계림호장 유석이 대대적으로 중창하고 사찰 이름을 ‘지질방사(池叱方寺)’라 하였다. 이후 사적의 기록은 없고 1690년(숙종 16)에 일암(一庵)이 중창하고 사찰 이름을 희방사로 변경하였다. 1810년(순조 10)에 불자들의 시주로 중창하고, 1815년(순조 15)에 경의(警誼)가 중건하였다.

그러나 1850년(철종 1)에 16전(殿)과 요사가 모두 소실되었다. 1852년(철종 3)에 강월(江月)이 요사 22칸과 산신각을 중건하였으며, 1853년(철종 4)에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權敦仁)이 ‘법희사(法喜社)’라는 편액을 썼다. 이후 광무 3년 을사에 해운(海雲)이 사찰을 중수했다고 하는데, 광무 3년은 1899년(고종 36)이고 을사년은 1905년이기 때문에 해운이 중수한 정확한 시기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해운대사가 중수할 당시 순흥부사인 심종순(沈鍾舜)이 상량문(上樑文)과 권선문(勸善文)을 지었다. 1927년에는 주지 도명(度明)이 영산전을 옮겨지었다.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희방사에 관한 기록은 없고, 19세기 후반에 편찬된 『영남읍지(嶺南邑誌)』와 『교남지(嶠南誌)』에는 희방사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희방사는 창건 이후부터 적어도 17세기까지의 사적은 알 수가 없다.

1951년 1월 13일 1.4후퇴 때 사찰 건물과 함께 사찰에서 보관하고 있던 『월인석보(月印釋譜)』 2권, 『법화경(法華經)』 7권의 판목 등 모두 200여 장이 소실되었고, 두운의 영정도 없어졌다. 그러나 주존불(主尊佛)만은 두운이 기거하던 천연동굴 속에 봉안하였다가, 1957년에 주지 담화가 중창한 뒤 대웅전[현재 지장전(地藏殿)]에 봉안하였다. 주지 담화가 1980년까지 사찰을 중창하고, 1986년 주지 설송이 주석하면서 조계종에서 인수하여 대웅보전(大雄寶殿)·삼성각·종각·누각·일주문·요사 등을 중창했다. 요사와 식당으로 사용하는 콘크리트 2층 건물은 1998년경에 신축하였고, 그 위 누각은 2003년에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황(조직,시설 현황 포함)]

원래 희방사에는 삼존불을 모신 조선 후기 건물인 극락전(極樂殿)을 비롯하여 나한전(羅漢殿)이 있었고, 불당을 겸한 10여 칸의 승당(僧堂)과 그 서편에 4칸 규모 요사가 있었다. 현 희방사는 대웅보전과 지장전을 비롯하여 삼성각·종각·일주문 및 3채의 요사로 구성되어 있다.

대웅보전은 희방사의 중심 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구조로 석가모니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구조로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구조로 칠성·독성·산신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종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인 사모지붕 구조이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구조로 된 대형 콘크리트 건물은 요사와 식당으로 사용하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각을 지었는데, ‘소백산 산야초 연구회’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이라고 쓴 현판을 단 일주문 및 요사 등이 자연 지형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관련 문화재]

희방사 동종(喜方寺銅鐘)[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26호]은 원래 1742년(영조 18) 단양군의 대흥사(大興寺)에서 승장(僧匠)인 해철(海哲)과 초부(楚符) 등이 제작한 중종(中鐘)이었으나, 대흥사가 폐사되면서 희방사로 옮겨졌다. 희방사 동종의 종신(鐘身)에는 주조 연대가 확실한 명문이 새겨져 있다. 희방사 동종은 전통적인 수법에 외래 요소인 쌍룡 구성의 용뉴(龍鈕)와 띠장식이 가미되어 있다. 이러한 혼합형식은 조선 후기에 유행하였다.

희방사에는 2기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두 석종형 부도의 조성 시기는 비슷하나 세부 수법이나 표현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들 부도의 배경은 알 수 없으나 희방사의 중건과 관련한 고승의 것으로 생각되며, 종형 부도는 조선시대에 크게 유행했기 때문에, 석종형 부도는 조선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6.25전쟁 당시 소실됐던 『훈민정음』 해례본 목판 목간본이 60년 만에 다시 희방사로 돌아왔다. 『훈민정음』 해례본 목판은 2018년에 경상북도, 안동시, 유교문화보존회가 복각하여, 원 소장처였던 희방사에 기증했다. 현재 종무소에서 보관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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