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재와 상원사 동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1232
한자 竹嶺-上院寺銅鐘
영어공식명칭 Jungnyeongjae Pass and Bronze Bell in Sangwonsa Temple(Folktal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다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10년 - 「죽령재와 상원사 동종」 『영주시사』2에 「죽령재와 상원사 동종」으로 수록
관련 지명 죽령재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지도보기
관련 지명 상원사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211-14[동산리 308-5]
성격 설화|전설
주요 등장 인물 운종도감|세조|역졸
모티프 유형 신이|애환

[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죽령에 전해오는 동종에 관한 이야기.

[개설]

「죽령재와 상원사 동종」의 무대가 되는 죽령재는 보통 ‘죽령(竹嶺)’이라 일컬으며, ‘대재’라고도 부른다. 고개의 높이는 689m로 고대부터 많은 사람이 죽령을 넘나들었고, 이와 관련된 많은 설화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또 설화의 소재인 동종은 국보 제36호로 지정된 ‘상원사 동종(上院寺銅鍾)’을 가리킨다. 상원사 동종은 725년(성덕왕 24)에 만들어진 현재 우리나라에 전하는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안동읍지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조선 초기까지 안동대도호부 관아 문루에 걸려 있었는데, 1469년(예종 1) 왕명으로 오대산 상원사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채록/수집 상황]

「죽령재와 상원사 동종」은 2010년 영주시사편찬위원회 간행된 『영주시사』2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죽령재와 상원사 동종」은 본래 불교의 범종으로 만들어졌으며, 안동 지역 어느 큰 절의 범종으로 역할을 해 오다가, 어느 시기부터는 관종(官鐘)으로 전락하여 조선 초기까지 안동대도호부 관아 문루에 걸어 놓고 시간을 알려주는 시보종(時報鐘)으로 이용되었다. 세조는 오대산 상원사를 원당 사찰로 삼아 전국 제일의 가람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때 전국에 있던 범종 가운데 가장 소리가 청아하며 멀리 가고, 자태가 아름다운 종을 찾아 원찰로 운종하라는 명을 내리고 상원사 승려에게는 이를 관리하는 운종도감(運鐘都監)의 직함을 내려 주었다. 운종도감이 된 승려는 전국 각지로 종을 찾아 헤매던 중 안동도호부 남문루의 동종을 발견하고는 상원사로 옮기게 되었다.

「죽령재와 상원사 동종」은 800여 년 동안 갖은 환란을 겪으며 고장을 지켜왔고, 주민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소중히 간직되고 있었으며, 정든 고장을 떠나야 하는 슬픔에 힘들어했다. 하지만 임금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1466년(세조 12) 초가을 어느 날, 바퀴 없는 나무 수레에 실려 500명의 역졸과 100여 필의 우마에 의해 정든 고장을 뒤로하고 평은·창부·창락역을 거쳐 십수 일 만에 죽령마루까지 말없이 끌려왔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없이 역졸들에게 끌려오던 동종이 영남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죽령마루에서 요지부동이었다. 4~5일을 두고 땅을 파고 온 힘을 다하였으나 동종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운종도감은 생각다 못하여, 그 자리에서 향을 피우고 제사를 올리고 독경(讀經)으로 달랬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심에 쌓여 있던 운종도감은 생각 끝에 종의 36개의 젖꼭지 중 한 개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잘라 종이 있던 안동도호부 남문에 정성스럽게 안치하고, 큰 제사를 올린 다음 죽령으로 돌아와 역졸에게 조심스레 동종을 당겨보라고 일렀다. 요지부동이었던 동종은 점점 끌리기 시작했다. 동종은 죽령을 떠나 단양·제천·원주·진부를 거쳐 상원사에 안치되어 500여 년 동안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죽령재와 상원사 동종」의 주요 모티프는 ‘신이(神異)’와 ‘애환’이다. 전승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동종’의 신이한 행적을 알리고, 한편으로는 ‘신이한 동종이 영주의 죽령에서 움직이지 않고 머물렀다.’라는 자부심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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