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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125
한자 東學農民運動
영어의미역 Donghak Peasant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준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전개 시기/일시 1894년 6월연표보기
전개 시기/일시 1894년 9월 2일연표보기
전개 시기/일시 1894년 9월 29일연표보기
전개 시기/일시 1894년 10월 10일연표보기
성격 농민 운동

[정의]

1894년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경상남도 하동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으킨 농민 운동.

[역사적 배경]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지배 체제에서 여러 가지 수탈을 받던 일반 농민층이 1876년 개항 이후 외세의 경제적·군사적 침투로 인해 이중으로 수탈을 받는 상황에서 생존권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1860년 동학이 창도된 이후 동학교도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자 동학교도들이 결집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 변혁과 외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면에서 동학과 농민층의 결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경과]

1.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와 하동 동학군의 활약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계기로 3월 들어 전라도 지역에서 본격적인 동학 농민군의 봉기가 이루어지고 관군과의 전투도 벌어졌다. 그러다가 5월 전주화약이 체결된 이후 농민군과 관군과의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6월 말 경복궁을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친일 내각을 구성해 일본의 구미에 맞는 개혁을 단행해 가기 시작하자 동학 농민군은 재차 봉기하게 되었다.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서도 1893년 이전부터 산청군 시천면 가차례리(加次禮里)에 본거지를 둔 백낙도(白樂道)를 중심으로 그 밑에 각 고을의 인물들이 들어와 동학교도로서 입문하고, 이들이 각 고을에 돌아가 동학을 확산시키고 있었다. 하동에도 이 시기에 이미 동학 조직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1894년 호남 지역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던 당시 하동읍에도 도소가 만들어져 동학교도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에 6월 말경 하동으로 부임한 하동부사 이채연이 화개 민포를 끌어들여 동학교도를 몰아냈다.

동학군의 제2차 봉기가 이루어질 무렵이었던 9월 영남 지역의 여기저기에서 먼저 동학군이 봉기하는데,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서는 호남의 동학군의 지원을 받은 하동 동학군이 선봉에 서는 모습을 보인다. 즉 9월 1일 광양으로 쫓겨 갔던 하동 지역 동학교도가 광양·순천포의 동학교도와 함께 섬진강을 건너 하동을 공격해 왔다. 하동부사는 피신해 버린 상태에서 하동의 민포가 주축이 되어 통영으로부터 대완포(大椀砲)를 가져와 대항했지만, 1, 2일 전투에서 동학군은 읍내를 점령한다.

읍을 장악한 동학군은, 외곽의 각 촌락으로 들어가 대대적인 보복 약탈을 행하였다. 그 이후 5, 6일을 더 머물고 있던 동학군 중 일부는 호남 지역으로 되돌아가고 나머지는 총대장 김인배(金仁培)를 따라 진주로 향하였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진주 등 인근의 각 고을에서도 동학군 봉기의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들이 진주로 모여들었다. 동학교도들은 9월 18, 19일의 대회를 마친 후 19일 퇴거하기 시작하였다.

2. 일본군과 합세한 정부군의 동학군 토벌

한편 조정과 감영에서는 이러한 소식을 접하고 대구판관 지석영을 토포사로 내정하여, 일부 군병을 이끌고 진주·하동 등지로 가서 일본군과 협동해서 동학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9월 25일 부산에 주둔하던 일본군 3개 소대 150명이 배편으로 창원 마산포에 도착한 후 두 길로 나누어 후지사카[藤坂] 소위가 이끄는 부대가 29일 먼저 하동으로 진출하였다.

그 날 하동 광평동에서 당시에 하동에 남아 있던 동학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졌고, 동학군은 섬진강 건너편으로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계속해서 강 건너 동학군을 추적하였지만 동학군의 종적을 감춰버려 동학군이 버린 무기·양식만 가지고 하동으로 돌아왔다. 이어 후속 부대와 합류한 일본군은 30일에도 섬진강 건너편에 동학군이 출몰하자 그 뒤를 추적하였지만, 노획물 이외에 별 성과가 없이 하동으로 철수하였다. 하동 곳곳에 수천의 동학군들이 출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10월 7일에는 제4중대장 스즈키[鈴木] 대위가 경상남도 서부 지역에 파견된 일본군을 총지휘하기 위해 곤양에 도착하면서 대구에서 파견된 관군과 일본군의 합류가 이루어졌다. 이 무렵 동학군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고 있어서 일본군·관군과의 전투가 많이 벌어졌을 것이지만,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경상남도 서부 지역 동학군의 주력이 크게 궤멸되었던 전투는 곤양의 금오산(金鷔山) 전투(戰鬪)와 진주의 고승당산(高僧堂山) 전투(戰鬪)로 알려져 있다. 일본군은 10월 10일 곤양 안심동 남쪽 금오산에 동학군 400여 명이 모였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두 부대로 나누어 공격해서 많은 동학군을 생포하고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4일 일본군이 진주의 서쪽 수곡촌에 이르자, 수곡촌 산야에 깔려 있던 동학군의 일부는 고승산성으로 퇴거해 방어 준비를 하였고, 일부는 북쪽으로 퇴거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이 있자 산성의 동학군들은 산꼭대기 누벽(壘壁)에 의지해서 완강히 저항하였고, 북쪽으로 퇴거하였던 동학군이 일본군의 우측을 공격해 왔다. 그러나 무기나 전투 기술면에서 월등한 일본군은 얼마 안가 산을 점령하였다. 산꼭대기의 방어 진지가 무너지자 동학군들은 서북 덕산 방면으로 후퇴하였고, 일본군 한 소대가 이를 추적하였지만 미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결과]

이날 전투에서 동학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이 수거한 동학군 사체만 186구였고 부근 주민의 소문에 의하면 퇴주하면서 수십 명의 폐사된 자가 있었다고 전해졌다. 그 이외에 생포 2명, 총·칼·화약·승마·화폐·쌀 등 많은 노획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일 일본군과 관군은 하동에 다시 호남의 동학군이 내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동으로 진격해서 20~21일 섬진강 건너 응치(應峙) 등에 출몰하는 동학군에 대해 몇 차례의 토벌에 나섰다. 일본군이 섬진강 건너편에서 동학군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하동 지역의 동학군들은 배후를 치는 작전으로 나왔으나 이도 곧 격퇴되고 동학군들은 퇴산하였다.

고승당산 전투에서 동학군의 주력이 크게 괴멸된 이후 관군과 일본군의 계속되는 토벌 활동으로 동학군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어 갔다. 그러나 동학군은 지리산 계곡을 근거지로 하여 사천·남해·단성·적량 등에서 무기를 탈취하는 등 경상남도 서부 곳곳에 출몰하면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이후 1895년 보수 유생 층이 중심이 된 을미의병이 봉기하자 여기에 합류하여 일본에 저항하였다.

[의의와 평가]

동학 농민 운동은 일본군의 개입과 자체적인 한계로 인해 좌절되기는 하였지만, 봉건적 사회 체제에 머물러 있던 우리 사회를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게 하려 했던 변혁 운동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 당시 심각해지던 외세의 침략에 대해 일종의 경종을 울리는 역할도 하였다. 그리고 동학사상이나 조직에 힘입어 최초로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됨으로써, 우리 사회의 변혁 운동을 한 단계 끌어올린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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