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6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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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登鳳凰臺-李敎文- |
영어의미역 | At Bonghwangdae Pavilion |
이칭/별칭 | 「봉황대에 올라」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봉대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윤호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8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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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958년 |
배경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봉대리 |
성격 | 한시|유선시 |
작가 | 이교문(李敎文)[1878~1958] |
[정의]
개항기에 이교문이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봉대리에 있던 봉황대를 찾아가 읊은 한시.
[개설]
「등봉황대(登鳳凰臺)」는 조선 말의 문인 학자 지재(止齋) 이교문(李敎文)[1878~1958]의 문집 『지재유고(止齋遺稿)』 권1에 수록되어 있다. 이교문은 하동 지역을 여행하면서 악양의 봉대리에 있었던 봉황대(鳳凰臺) 유허를 찾아갔는데, 봉황대는 보이지 않고 물가에 풀만 우거진 것을 보고서 그 아쉬운 마음을 시로 읊었다.
봉황대는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봉대리에 있던 정자로, 1899년(고종 36) 진주에 살았던 하겸진(河謙鎭)이 지리산[1,915m]을 유람하고 지은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도 보인다. 하지만 이교문이 하동을 여행하였을 당시에는 봉황대가 없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교문의 초명은 교관(敎爟), 자는 명선(鳴璇), 호는 지재(止齋),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구성]
칠언 절구의 구성법에 맞게 전개한 한시이다. 기구에서는 자신이 하동으로 유람하게 된 시점을 밝히고, 승구에서는 여행하며 보고 들은 경물에 대해 말하였다. 전구에서는 봉황대가 없어져 찾을 수 없는 사실에 대해 노래하였고, 결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봉황대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었다.
[내용]
행년사십시남유(行年四十始南遊)[나이 사십에 남쪽으로 유람을 떠나와서]
답진천산우백류(踏盡千山又百流)[수많은 산과 시내에 오르고 또 건너갔네]
차문봉황하처거(借問鳳凰何處去)[묻노라니 봉황대는 어디로 가 버렸는가]
단간청초만정주(但看靑草滿汀洲)[다만 푸른 풀 가득 우거진 물가만 보이네]
이를 풀이하면, 제1구에서는 자신이 나이 40살이 되어 비로소 남쪽 지방 나들이를 시작하였다는 소회를 말하였고, 제2구에서는 남쪽 지방을 여행하며 수많은 산과 시내를 모두 지났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제3구에서는 봉황대가 어디에 있는가를 모르는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였고, 제4구에서는 봉황대는 보이지 않고 물가에 푸른 풀만 우거져있음을 말하였다.
[특징]
「등봉황대」는 이교문이 생애 처음으로 여행을 와서 하동군 악양의 봉대리에 있던 봉황대를 찾았지만, 봉황대는 보이지 않고 물가에 푸른 풀만 우거진 쓸쓸한 정경을 노래한 한시로, 기대와 달리 찾을 수 없는 봉황대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었다. 하동의 악양면 봉대리는 중국 금릉 봉황대(登金陵鳳凰臺)를 본 따서 지은 이름이다. 「등봉황대」는 하동 지역에서 봉황대를 읊은 드문 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