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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민족 전선 제주도 위원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0793
한자 民主主義民族戰線濟州島委員會
영어음역 Minjokjuui Minjok Jeonseon Jejudo Wiwonhoe
영어의미역 Democratic National Front, Jejudo Council
이칭/별칭 민전 제주도 위원회,제주 민전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윤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좌익 조직
설립연도/일시 1946년 2월 23일연표보기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었던 민주주의민족전선 소속 제주도 위원회.

[설립 목적]

남한의 모든 좌익 정당 및 사회 단체를 총집결하여 과도 정부 수립에 참여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변천]

민주주의 민족 전선[민전] 제주도 위원회 결성 대회는 1947년 2월 23일 제주도 읍·면 대의원과 사회 단체 대표 315명, 방청객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읍 조일 구락부에서 열렸다.

결성 대회에서 안세훈, 이일선, 현경호 등 3명이 의장단에, 김택수, 김상훈, 김용해, 오창흔 등 4명이 부의장단에 추대되었다. 대회식에 처음 등단한 안세훈 의장은 “세계 민주주주의 체계에 입각한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은 민주 과업을 진정하게 실천하게 되므로 삼천만 동포의 한사람까지라도 민주주의 민족 전선 산하에서 최후까지 삼상 회의 결정의 실천을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는 요지의 개회사를 하였다. 이어 경과 보고, 국내·외 정세 보고, 민생 문제 보고, 친일파 동향 보고 등이 있었다.

조몽구는 친일파 문제를 거론하면서 “악질 중의 악질은 과거 일제에 아부하던 자로서, 또다시 권세를 부려 보려고 인민 위원회에 가담하였다가 탄압이 심함을 보고 슬그머니 빠져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기회주의자들이다”고 지적하였다.

지방 선거 행동 강령에 대한 긴급 동의로 민주주의 민족 전선 11개조 요구 조건을 관철해 달라는 진정서를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안세훈 의장은 당면한 3·1 기념 행사를 평화롭게 행해야 된다는 설명을 덧붙였으며, 박경훈 제주도지사의 축사도 있었다.

한편 민주주의 민족 전선 제주도 위원회는 2월 24일 상임 위원회를 개최하여 사무국장 겸 조직부장에 김정노, 선전부장 좌창림, 문화부장 김봉현, 조사부장 정상조, 재정부장 김두훈 등을 선임하였다.

[활동 사항]

민주주의 민족 전선 제주도 위원회는 결성과 더불어 당면한 1947년 3·1 기념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1947년 2월 25일 미군정 경찰 고문관을 방문하여 면담을 요구하였다. 또한 3.1절 기념 시위 사건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자 민족주의민족전선 제주도 위원회 사무국은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각계가 참여하는 진상 조사단을 구성하자고 제안하였으나 경찰은 이를 거부하였다.

3·1절 기념 시위 사건에 대한 항의가 총파업으로 이어지는 등 제주가 들끓자 미군정 당국은 대규모 검속을 벌여 현경호 의장 등 민주주의 민족 전선 제주도 위원회의 간부 다수를 검거하여 민주주의 민족 전선 제주도 위원회는 발족 초기부터 커다란 시련을 겪었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 위원회 임원진 일부가 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일본과 육지 등지로 떠나거나 조직에서 탈퇴한 사람들이 생겨 한동안 활동이 소강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47년 5월에 이르러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재개되면서 민주주의 민족 전선의 활동도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민주주의 민족 전선 제주도 위원회는 대중적인 지지를 확산하기 위해 7월에 대폭적으로 조직을 정비하였다. 미군정 하에서 초대 제주도지사를 역임하였던 박경훈을 의장으로 추대하였고 항일운동가 김시범을 부의장으로 선출하였으며 사무국장에는 고창무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8월 15일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불어 닥친 검거 선풍에 따라 민주주의 민족 전선 제주도 위원회박경훈 의장을 비롯한 30여 명의 간부가 구금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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