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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1228
한자 孝子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남궁조 정문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817-1지도보기
소재지 남궁지 정문 -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817-1지도보기
소재지 임일기 정문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소재지 최규석 정문 -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지도보기
소재지 창정각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상리 368지도보기
소재지 최제·최혁 효자정문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 232지도보기

[정의]

경기도 양주 지역 출신이거나 양주에 연고가 있는 사람으로서 부모를 극진하게 봉양한 자녀.

[개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에서는 넓게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좁게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관계가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우선하는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부자 관계를 지배하는 행위 규범은 효(孝) 또는 효도로 집약될 수 있다. 효는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유교의 도리 중 하나로 삼국 시대에 이미 고구려의 태학(太學), 신라의 국학(國學) 등의 교육 기관을 통하여 충(忠)과 함께 교육되었다.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가의 충성과 함께 가족 윤리로서 효도가 장려되었다. 고려 시대 효 관념은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를 배경으로 하였고, 조선 시대는 성리학적인 질서가 정착됨에 따라서 효는 정치적, 사회적 관념으로 체계화되었다. 효도를 중요시한 문화적 전통은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효자를 낳았고, 그들의 효심은 학자들의 문집에 담기거나 효자비(孝子碑)의 비문에 실려서 가문의 자랑거리이자 덕행의 표준이 되었다.

[인물 및 내용]

1. 김성오

통덕랑 김성오(金聲五)는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부모 봉양에 있어서는 부잣집 아들 못지않았다. 겨울에 부모가 생선이 먹고 싶다면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서 올렸고, 장례를 치를 때에도 정성을 다하였으며 3년을 하루같이 애도하였다고 한다. 정문이 내려졌다고 하는데, 현재 그 자리는 알 수 없다.

2. 김진태

김진태(金鎭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모의 봉양에는 정성을 다하였다. 음식을 올릴 때에는 먼저 맛을 보고 부모의 식성에 맞추었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항상 그 옆에서 병간호를 하였으며,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진단하였다. 위급함에 이르러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넣는 등 온갖 노력을 하였으나 노환으로 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르고, 3년을 하루같이 묘에 엎드려 통곡하니 풀이 자라지 못할 정도였다. 1867년(고종 4) 7월 폭우로 마을 전체가 화를 당하였으나, 그의 집만은 무사했다. 주위에서는 지극한 효성의 덕이라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유림들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1887년(고종 24) 정문이 내려졌다.

3. 남궁조

남궁조(南宮鋽)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게 되자 옷차림을 한 번도 풀지 않고 정성으로 약을 달여 드시게 하였다. 밤이 되면 북두칠성을 향하여 자신이 대신 죽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정성으로 시묘살이를 하였다. 조정에 알려져 정문이 내려졌고, 조봉대부(朝奉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정문은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817-1번지에 있다.

4. 남궁지

남궁지(南宮墀)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정성으로 모셔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3년을 하루같이 슬퍼하였다.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져 정문이 내려졌으며, 조봉대부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정문은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817-1번지에 있다.

5. 박준

박준(朴峻)[1559~1625]은 본관은 비안(比安), 자는 자첨(子瞻), 호는 귀전(歸田)으로, 삭주부사를 지낸 박희성(朴希聖)의 아들이다. 1604년(선조 37) 풍병을 앓는 아버지를 위하여 당시 어의인 허준(許浚)을 모시려 하였으나 어렵게 되었는데, 정성으로 애원하자 허준도 그 효성에 감복하여 약을 지어 주었다. 그 후 병이 재발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흘려 넣어 병을 낫게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 학질을 앓는 계모 민씨를 업고 피난하느라고 처자를 돌보지 못하여 마침내 부인 박씨까지 잃었다. 이러한 효행으로 1604년 헌릉참봉에 제수되었다.

1610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고, 어느 날인가 산불이 나서 묘까지 번지려고 하자 몸을 던져 불을 끄면서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으니 갑자기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불이 번지지 않았다고 한다. 향교 유림들의 추천으로 조정에서 정문을 내렸고, 무안현감(務安縣監)을 제수하였다. 현재 정문의 위치는 알 수 없고, 다만 양주시 남면 신암리 감악산 백정봉에 효행을 적은 팔각비(八角碑)가 묘와 함께 남아 있다.

6. 박형

감역을 지낸 박형(朴炯)은 어머니가 병이 들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넣었고, 상을 치른 후에는 3년을 시묘살이하면서 애통해 하였다. 또한 형제간의 우애도 남달랐는데, 동생이 전염병으로 죽자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몸소 염(殮)을 하였으며, 또 다른 동생이 죽었을 때에도 그렇게 하였다. 나라에서 정문을 내렸는데, 현재 그 위치는 알 수 없고 기록에만 남아 있다.

7. 서명재

서명재(徐命載)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모친의 병환이 위독함에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판단하였고, 겨울에는 얼음구멍에서 고기를 잡아 봉양하였다. 또한 아버지의 등창이 심하여 의원도 손을 대지 못할 정도로 구정살이 박힌 것을 한 달 동안 입으로 빨아내어 독근을 제거하여 낫게 하였다. 부친상을 당해서는 60세가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예를 다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포상과 정문이 내려졌는데, 현재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8. 여광억

여광억(呂光億)은 본관은 함양(咸陽),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여필시(呂必時)이다. 모친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약으로 썼다. 여광억은 어머니의 증직 교지를 받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피를 너무 토하여 눈이 멀었고,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내인 이씨 또한 효부로 이름이 높았다. 부부의 정문이 세워졌던 자리는 현재 알 수 없다.

9. 이두성

『삼강록(三綱錄)』에 의하면, 양주에 사는 유학 이두성(李斗星)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평소 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고, 모친상을 당해서는 장례 후 묘 아래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상복을 한시도 벗지 않았다. 비바람이 불지라도 하루에 세 번씩 묘를 돌보면서 죽과 간장으로 연명하였다. 계모상을 치르면서도 친모의 상례와 다름이 없었다. 조정에서 정문을 내렸다고 하는데,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10. 이만석

이만석(李晩錫)은 일곱 살에 눈이 멀고, 열 살에 아버지를 여의어 글과 예절을 배우지 못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을 하루같이 산길을 더듬어 성묘를 하니 산골에는 길이 생기고 무릎에는 굳은살이 박혔다. 70세가 넘어 기력이 모자라 성묘를 하지 못하게 되자 사당에 매일 부복하였다. 죽을 때는, 어버이의 머리카락과 옷가지를 널에 같이 넣으면 지하에서 부모를 만나볼 수 있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를 유언으로 남겼다. 조정에서는 그 지극한 효행을 알고 표창과 정문을 내리고, 자손에게 부역을 면제하는 은전을 주었다. 현재 정문의 위치는 알 수 없다.

11. 이복운

이복운(李復運)은 가족 모두가 전염병에 걸리자 아버지를 등에 업고 피하였으나, 결국 병에 걸리고 말았다. 약을 달여 올릴 때는 먼저 맛을 보고 드리고, 밤마다 북두칠성을 향하여 자신이 먼저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이어서 어머니도 감염되자 한 베개에 같이 누워 시중을 들었다. 효행이 남달라 조정에서 포상하고 정문을 내렸다고 하는데, 현재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12. 이숙

통덕랑을 지낸 이숙(李 火+肅)은 오직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님이 병이 들자 먼저 맛을 보고 약을 올렸으며, 반년 동안 관복을 벗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병이 악화되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 드시게 하였고, 돌아가신 뒤에는 조석으로 성묘하기를 날씨의 변화에 개의치 않았다. 조정에서 정문을 내렸는데, 현재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13. 이욱

양주에 살던 통덕랑 이욱(李煜)은 선조 때 명신이었던 지퇴당(知退堂) 이정형(李廷馨)[1549~1607]의 5세손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넣어 소생시켰으며, 상을 당해서는 예를 다하여 초종을 마치고 시묘살이를 하는 3년 동안 눈비를 가리지 않았다. 조정에서 이를 알고 포상하고 정문을 내렸다고 『삼강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정문의 위치는 알 수 없다.

14. 이원중

이원중(李元中)은 사마 이담조의 아들로 천성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말을 어긴 적이 없을 정도이며, 아홉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상례를 치르는데, 성인과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3년간 시묘살이도 정성으로 하였다. 이 효행 사실이 널리 퍼졌고,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예조에서 이를 표창하기 위해 가선대부 동몽교관을 증직하고, 정문을 내렸다. 정문은 양주시 백석읍 오산리 소오산에 있었으나, 6·25 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15. 이탁

이탁(李濯)은 오랫동안 아버지의 병을 간호하면서도 한 번도 옷끈을 풀지 않았고, 아버지가 밥을 먹지 않으면 같이 굶으면서 돌보았다. 또한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여 밤새도록 밖에서 하늘에 기도하고 대변의 맛으로 병의 경중을 가렸다. 엄동설한에 모친상을 당하여서는 석 달 동안 거적을 깔고 곡을 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거적 밑에 돌을 따뜻하게 하여 넣었더니 울며 거절하고 하루같이 애통해 하였다. 부모가 병중에 청어를 먹지 못하였다고 하여 이 생선을 보기만 하면 눈물을 흘리며 먹지 않았다. 조정에서 정문을 내렸는데, 현재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16. 이현석

이현석(李玄錫)은 열 살 되던 해에 어머니의 등창이 심해서 백약이 무효할 정도였는데, 3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어 병을 낳게 하였다. 스무 살 때에는 어머니 병에 계황(鷄黃)을 써야 한다는 의원 말에 따라 어렵게 구하여 드시게 하여 병을 낳게 하였다. 그 뒤 상을 당하여 애통해 하는데, 눈물이 모자라 이목구비로 피를 흘리고 한 달 만에 죽고 말았다. 조정에서 정문을 내렸다고 한다.

17. 임일기

임일기(任日箕)는 부모가 병이 들자 변의 맛을 보아 병세를 짐작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넣어 회생케 하였는데, 주위에서 이 사실을 알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느 날에는 어머니의 병 때문에 약을 구하러 집을 나섰는데, 이웃집에서 불이 나 옮겨 붙게 되었다. 병이 든 어머니는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 때 임일기가 돌아와 보니 집이 막 타기 시작하였다. 화염을 무릅쓰고 안으로 뛰어들었지만 머리와 이마가 불에 타는 등 연기와 뜨거운 열기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반대로 불고 비가 내려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주위에서는 지극한 효성을 하늘이 알고 비를 내린 것이라고 하였다. 또 어떤 날은 어머니에게 바칠 음식이 없었는데, 꿩이 날아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고 물고기가 튀어나와, 이것을 잘 요리하여 드린 적이 있었다. 뒤에 조정에서 효자 정문을 내렸다. 정문은 양주시 회암동에 있다.

18. 임홍기

임홍기(任弘紀)는 효성이 지극하여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 살폈으며, 밖에 나갔다가 새로 난 과일을 보면 손수 가져와 부모에게 드렸다. 병환 중에는 대변의 맛으로 병의 경중을 헤아렸고, 밤마다 대신 죽게 해달라고 북두칠성에 빌었다. 상을 당했을 때는 3년간을 피눈물로 보내 병을 얻기도 하였다. 정문이 내려졌으나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19. 최규석

최규석(崔圭錫)은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여윤(汝胤), 호는 가곡(嘉谷)으로, 효자 최혁(崔爀)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할머니와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회생케 하였다. 또한 학문에도 정진하여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1894년(고종 31)에 효자 정문을 내렸다. 정문은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에 있다.

20. 한진

한진(韓震)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병환이 깊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흘려 넣었으며, 또한 다리의 살을 도려내어 약으로 바칠 정도였다. 하늘도 그 효성에 감동하여 병세가 다소 회복되었다고 한다. 그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죽만 먹으면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문이 내려졌다고 하는데, 현재 그 위치는 알 수 없다.

21. 기타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 232번지최제(崔濟)최혁의 효자 정문이 있으며, 장흥면 삼상리 368번지에 있는 창정각(彰旌閣)에는 세종, 예종, 성종 대에 삼중으로 포상을 받은 한치형(韓致亨), 1608년(선조 41)에 부역 면제의 혜택을 입은 한도제(韓道濟), 순조 대의 한용빈(韓用 斌+貝), 고종 대의 한의이(韓義履), 한덕이(韓德履) 등 5명의 효자 정려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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