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400339
한자 戊申亂
영어공식명칭 Mooshin Revolt
이칭/별칭 이인좌의 난,정희량의 난,무신변란,무신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소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728년 3월 12일연표보기 - 무신난 발생
전개 시기/일시 1728년 3월 20일 - 정희량 안음 점령
종결 시기/일시 1728년 4월연표보기 - 무신난 종결
발생|시작 장소 무신난 - 경상남도
성격 반란
관련 인물/단체 정희량|이인좌

[정의]

1728년 영주 지역에서 이인좌·정희량 등이 영조와 노론을 타도하기 위해 일으킨 난과 영주의 의병활동.

[개설]

무신난(戊申亂)은 1728년(영조 4)에 발생하였는데,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의 이름을 따서 ‘이인좌(李麟佐)의 난’, 또는 ‘정희량(鄭希亮)의 난’이라고도 한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노론(老論)이 정국을 장악해 가기 시작했고, 반면에 소론(少論)의 입지는 약화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 소론 강경파와 숙종 연간 정계에서 배제된 남인 중 강경파 일부가 연합하여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한편, 주동자 정희량은 영주 지역에 연고가 있던 인물이지만,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 영주 지역 사림들은 무신난을 진압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역사적 배경]

숙종 연간 소론은 세자인 경종을 지지하였지만, 노론은 연잉군(延礽君)[영조]을 지지하며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였다. 이후 경종이 즉위하자 소론 강경파들은 1721(경종 원년)~1722년 신임옥사(辛壬獄事)를 일으켜 노론 대신들을 제거하였다. 하지만 경종은 즉위 4년 만에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정국은 급변하게 된다. 영조 즉위 후 노론 세력들은 신임사화를 문제 삼기 시작하였고, 반대로 소론의 입지는 약화되어 갔다. 이에 이인좌를 비롯해 박필현(朴弼顯)·이유익(李有翼)·심유현(沈維賢) 등 소론 강경파는 영조의 왕위 계승권을 부정하며, 무신난을 일으키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자 밀풍군(密豊君)을 추대하였다.

특히, 무신난에서 주목할 점은 소론 세력뿐만 아니라, 숙종 연간 이후 정계에서 소외된 일부 남인 세력도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무신난을 주동한 정희량은 정온(鄭蘊)의 후손으로 경상도 안음[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지역에 세거하던 남인 명문가 출신이다. 그런 가운데 정온의 4대손이자 정희량의 아버지인 정중원(鄭重元)이 경상도 안음에서 순흥도호부로 이주하게 되면서, 무신난 직전 정희량은 영주 지역과도 연고를 가지게 되었다.

[경과]

1728년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시키면서 무신난은 시작되었다. 당시 무신난 가담자를 보면, 한양에서는 이하(李河)·이사성(李思晟)·양명하(梁命夏)·남태징(南太徵)·윤덕유(尹德裕) 등이 호응하였고, 지방에서는 정희량[안음], 나만치(羅萬致)[은진], 조덕규(趙德奎)·조상(趙鏛)·임서호(任瑞虎)[여주·이천], 정세윤(鄭世胤)·권서린(權瑞麟)·이호(李昈)[안성·진위], 민원보(閔元普)·민백효(閔百孝)[충주], 김홍수(金弘壽)[상주], 이일좌(李日佐)[과천] 등이 확인된다. 무신난 직전 순흥도호부에 이거해 있던 정희량은 경상좌도의 남인들을 포섭하려고 했으나, 안동 사림의 소극적인 태도로 자신의 근거지인 경상우도의 남인들을 규합하였다. 정희량은 1728년 3월 20일 거병하여 안음 일대를 점령하였고, 이후 1728년 4월 3일까지 거창·합천·함양 등을 점령하였다.

한편, 영주 지역 사림들은 정희량 등이 무신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의병을 조직하였다. 더구나 순흥도호부 지역은 단종복위운동으로 역향(逆鄕)으로 몰려 혁파되었다가, 복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전력이 있었기에 무신난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정희량으로 인해 다시 역향으로 내몰릴 위기에 처하자, 적극적으로 관군에 협력하여 의병을 조직하였다. 이에 순흥도호부 사림들은 대장에 이징도(李徵道)[또는 이휘도(李徽道)]를 추대하고, 황우일(黃宇鎰)을 참모, 박경지(朴敬祉)와 서만유(徐萬維)를 서기에 임명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영천군에서는 나학천(羅學川)이 대장이 되어, 김정·정옥(鄭玉)을 부장, 성세욱(成世頊)·장위긍(張緯恆)·송유식(宋儒式)·정일신(鄭一愼) 등을 참모로 삼고 의병을 일으켰다. 풍기군에서는 권경렴(權景濂)이 대장이 되어 김주억(金胄嶷)을 부장, 김태언(金兌彦)·권대경(權大經)·조중정(趙重鼎) 등을 참모로 삼고 의병을 일으켰다.

[결과]

영조는 오명항(吳命恒)을 사로도순무사, 박찬신(朴纘新)을 도순무중군, 박문수(朴文秀)를 종사관으로 각각 임명하여 무신난을 진압하게 했다. 이에 관군은 1728년 3월 24일 안성과 죽산을 회복하고 이인좌 등을 생포하였다. 정희량의 부대도 역시 관군에 의해 패배하였고, 결국 거창에서 선산부사 박필건(朴弼建)과 곤양군수 우하형(禹夏亨) 등에게 체포되어 참수당하였다.

무신난을 진압하기 위해 순흥·영천·풍기 등 영주 지역의 사림들은 적극적으로 의병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난이 진압된 이후 영조는 영남을 역향으로 지목하여, 한동안 영남 사림의 출사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순흥의 의병 대장 이징도와 영천의 의병 대장 나학천무신난 때 공을 세웠기에 1731년(영조 7) 2월 27일 경상도암행어사 이흡(李潝)이 조정에 포상을 청원하였으나, 영조에 의해 거부된 사실은 당시 영남에 대한 조정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의의와 평가]

무신난 이후 영주 지역 사림들은 당시 창의(倡義)를 절의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추숭하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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